영화 <범죄도시>의 폭력배가 숨이 끊기려는 찰나 배고프다고 연변 사투리로 중얼거릴 때. <악인전>의 연쇄살인마가 퀭한 눈을 치켜뜰 때. <킹덤>의 미스터리한 사내가 복수심을 담은 채로 오직 생명을 지키고자 행동할 때. 그 모든 얼굴이 김성규의 것이다.
지금까지 한 인터뷰를 찾아보니 모범적인 답변을 하는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능 전국 수석이 학습의 비결을 밝힐 때처럼. 연기라는 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더 진중해진 면이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는 노래하고 춤추고 까불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좀 무거워진 걸 나도 느낀다.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지 않지만, 무엇보다 배우라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역할과 스타일에 따라 참 다양한 얼굴이 보인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다소 슬픈 표정의 사진이 있던데, 또 다른 얼굴이라 놀랐다. 그건 언제 찍은 것인가? 연극 공연을 할 때인데 아마 2016년 즈음일 거다. 영화 <범죄도시>를 하기 전이다. 작품 포스터를 찍으면서 개인 프로필 사진으로 찍어본 거다. 평소에는 안경을 잘 안 쓰고 다니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서 안경을 착용하긴 한다.
지난해 영화 <악인전>으로 칸 영화제에 갔을 때만 해도 머리가 어깨까지 닿는 장발이었다. 긴 머리도 참 잘 어울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웃음). 근사하게 잘 어울린다기보다는 나쁘지가 않아서 신기했다. 원래 머리 매만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늘 짧은 머리 스타일을 고수했거든.
약 1년 전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에서 당신이 맡은 영신은 듬직하면서도 미스터리한, 어떤 분위기로 존재했다. 무엇보다 여기저기 참 많이 뛰어다니더라. 잘 뛴다. 학창 시절 백 미터 달리기 기록 기억하나? 12, 13초 정도였다. 어릴 때 달리기를 워낙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전학 온 친구가 우리 반에서 제일 빠른 사람이 누구냐고 묻더라고. 방과 후 둘이 시합을 했다. 내가 졌다(웃음). 몸으로 하는 일은 연습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어서, 액션 연기에는 자신이 좀 있다.
3월 13일 <킹덤> 시즌 2가 공개된다. 개인적으로 <킹덤>은 이야기 자체보다 연출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생사역이 주는 공포와 대비되는 유려한 산수 풍경을 보는 것도 의외의 즐거움이고. 주로 어느 지역에서 촬영했나? 촬영지를 돌아다닌 거로 치면 시즌 1 때 더 여기저기 다녔는데, 이번 시즌 2 촬영하면서는 문경에 자주 갔다. 강원도 고성군에서도 촬영했고. 일을 마친 후 형들과 고성에서 속초까지 걸은 날도 있다.
형? 주지훈도 당신에게 형인가? 그렇다. 그 사실을 처음 안 사람은 모두 놀라지….
아니 근데, 그 거리를 걸었다고? 몇 시간이 걸릴 텐데. 지방에서 촬영 마치고 나면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까. 촬영을 먼저 마친 누군가가 ‘이따 준비해서 만나자’ 하면 다 같이 만나서 출발했다. 고성에서도 바닷가와 인접한 거의 끝쪽에서 출발하니 걸을 만했다. 한번은 시간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해가 지고 어두운데 찻길을 걸어야 했다. 그때는 위험하니까 군대 행군하듯이 한 줄로 길게 서서 구석에 바짝 붙어 걸었다. 뒤에 선 사람이 플래시로 길 앞을 비춰주면서.
전염병을 피해 동래에서 상주로, <킹덤>의 피난 길과 동선을 생각하면 출연 배우들의 진정성이 우러나오는 에피소드다. 아무래도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촬영 현장에서 어우러지기가 좀 편했다.
좀비가 처음 달리는 설정을 선보인 영화가 뭐였는지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그런 할리우드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좀비가 뛴다’는 건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무서운 대신 느린 게 좀비의 미덕인데, 이건 게임의 룰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처사여서. <킹덤>의 생사역들도 눈을 뜨자마자 몸 푸는 워밍업 없이 바로 일어나 달리던데? 현장에서 무섭진 않나? 무섭진 않다, 이제는. 그런데 내가 평상시에 무서운 영화를 잘 안 보는 편이다.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들을 썩 좋아하지 않아서. 시즌 2에서는 여러모로 더 무서워졌다. 엄청 무서운 것 같다. 일단 그들의 수가 너무 많다. 이건 뭐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할 수가(웃음).
보조 출연자의 수가 상당하겠다. 대규모 신이 많은데, 멀리서 보고 있으면 가끔은 환 공포증 비슷한 걸 느낄 정도로 수가 많고 규모가 크다. 최대한 CG를 안 쓰고 실제로 촬영하려고 애쓴 작품이다. 그리고 현장의 에너지 자체가 무섭게 느끼게끔 한다. 다들 너무 열심히 하시니까. 무서운 렌즈 낀 채로 막 달려오면….
단역이 아닌 역할로 처음 출연한 영화가 <범죄도시>다. <악인전> 때도 당신에게서는 신인의 미진한 면 같은 게 안 느껴졌다. 그 전에 연극 할 때는 어떤 작품을 했나? 창작극이나 고전을 각색한 작품을 많이 했다. 모든 관객이 즐겁게 볼 만한 대중성 있는 연극은 별로 안 했다. 무게감 있고, 불편한 지점이 있기도 한 공연이 많았지. 힘든 일을 겪고, 각성하고, 죽음을 맞기도 하는 역할들. 스물여덟 정도 되어서야 극단에서 연기하기 시작했으니 햇수로만 치면 연극 활동 한 건 5년 정도밖에 안 됐다.
<킹덤> 촬영을 마친 후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떠났다가 <악인전>에 합류하자는 연락을 받았다고 들었다. <범죄도시>의 진선규가 충무로의 발견이었듯이 김성규도 그 작품 한 편으로 금방 후속작 제의가 들어왔나? 촬영 순서상으로 <범죄도시>, <킹덤>, <악인전> 순인데 <킹덤>의 김성훈 감독님도 <범죄도시>가 개봉하기 전에 편집본을 먼저 보시고 나를 오디션에 불렀다. 감독님이 나를 살펴보기 위해 <범죄도시> 편집본을 구해 본 건 아니었겠지만.
<범죄도시>에서 장첸 역을 맡은 윤계상의 수하가 당신과 진선규 두 명인데, 극 중 진선규의 비중이 좀 더 컸다. 진선규와 당신 캐릭터의 차이가 시나리오상에 설명되어 있었나? 그런 건 없었고, 내가 연기할 부분의 묘사는 ‘쳐다본다’, ‘뒤에 서 있다’ 같은 게 많았다. 앞에 나서는 행동대장 역은 진선규 형이 했기 때문에, 이를테면 그가 무슨 행동을 할 때 나는 ‘뒤에서 쳐다보고 있다’ 같은 식이었다. 그래서 촬영하는 동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불안한 지점이 있었다. 혼자 서 있을 때도 어떻게 서 있으면 좋을까를 고민하면서 뭔가를 좀 더 만든 것도 있고. 리허설을 거치면서 형들과 자연스러운 관계가 형성돼서 3인방답게 나온 듯하다.
<범죄도시>의 양태는 배고픔이 느껴지는 범죄 조직원이었고, <악인전>의 연쇄살인마는 식욕보다 살인욕으로 삶을 유지하는 듯한 인물이었다. <킹덤>의 영신은 조선시대 가난한 백성들이 그렇듯 밥 한 끼를 제대로 먹기가 힘든 처지다. 20대의 김성규는 어땠나? 아르바이트를 아주 많이 했다. 도시락 가게에서 도시락 만들고, 마트에서 일했고, 법원 같은 큰 건물에 들어가는 가구 옮기는 일, 무대 설치하는 일도 해 봤다. 그러면서 연극 했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삶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를 생각하면 좀 더 계획적으로 살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공연 한 번 하고 나면 막무가내로 아르바이트하는 생활을 오갔다,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뭘 하면서 어떤 시간을 보낼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나? 앞뒤로 아무 일정이 없을 때. 그럴 때 정말 편안하다. 내일에 대한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상태 말이다. 좋은 시간에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더 재밌게 보낼 수도 있는데, 일이 있는 와중이면 그게 마음만큼 되지는 않더라. 내가 ‘멀티’를 잘 못하는 타입이어서 뭐 하나에 빠져 있으면 평소 연락을 자주 하던 사람들과도 잘 안 하게 된다. 요즘엔 좀 바뀌는 게 좋겠다 싶어서 신경 쓴다. 이번에 <킹덤> 제작 발표회를 마치고 나서 형들과 이야기하고 밥 먹 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았다. 혼자 있는 거로도 충분했던 시간은 이미 길게, 오래 보낸 듯하다.
어떤 연애들을 했나? 어떤 사람과 했냐고 묻는다면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친구들과 주로 만났던 것 같다. 한 사람과 오래 만나기도 했고. 내가 아주 세고 강해 보이고, 리드하는 면도 있는데 그런 점을 알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만난 듯하다.
자신이 세 보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마스크에 그런 느낌이 있지.
3월 23일부터 방영하는 tvN <반의반>에서는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부드럽게 나올 것 같다. 이제 살인과 액션이 없는 피아니스트 역할이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과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이숙연 작가에게는 섬세한 손길도 있고. 정해인, 채수빈, 이하나 등 등장인물 각자의 상처가 누군가로 인해 치유되고 성장하는 이야기다. 그 치유와 성장을 일으키는 게 짝사랑일 수도 있고, 인간적인 교류일 수도 있고. 나는 내면에 힘듦을 지닌 역할이다. 심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인데, 그걸 티 내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인물.
뭐가 그렇게 힘든가? 피아노 때문에? 그게 바로 드라마에 중요한 열쇠가 되는 내용이어서… 사랑에 관한 일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까?
<반의반>이 방영을 시작하면 당신의 인지도가 눈에 띄게 높아질 거다. 특히나 <범죄 도시>와 <악인전>과 <킹덤>을 본 시청자라면 당신이 ‘그 작품에서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에 아주 놀랄 것 같다. 지금까지의 작품들과 다른 면을 보였을 때 그걸 얼마나 좋게 봐주실지, 내가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이 크다.
극단 생활 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이끌어온 동력은 무엇이었나? 부담감. 그건 영화를 하기 전 연극 공연을 하던 때부터도 있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의견을 묻거나 도움을 요청하면서 산 편은 아니지만, 어떤 순간이 되면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내 밀었던 것 같다. 나 스스로 한 선택들은 결국 누군가가 ‘같이 해볼래?’라고 먼저 손 내밀었기에 가능했다. 연극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도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고. 그런 점을 생각하면 크고 작은 부담감, 불안함이 생겼다. 그게 계속 연기를 잘 해내야 한다는 일종의 힘이 됐다.
영화 작업을 시작한 이후 여러 영화를 보면서 공부하고 그랬나?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부지런히, 열심히 찾아보는 마니아들에 비하면 결코 많이 봤다고 할 수 없다. 한국 영화를 주로 보는데 <파이란>은 참 여러 번 봤다. <박하사탕>도 좋고. 특히 요즘 무겁지 않은 걸 찾아보려고 하는데 뭐가 있더라… 아, <퐁네프의 연인들> 좋아한다. 그것도 무겁네(웃음).
<퐁네프의 연인들>에 나오는 드니 라방과 비슷한 데 있다는 말 들어봤나? 대화하는데 드니 라방이라고 하니까 그와 중첩되는 이미지가 살짝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신에게 워낙 여러 얼굴이 있으니까. 드니 라방이라니! <홀리 모터스>도 좋아하는 영화다. 그 배우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 ‘드니’다(웃음).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포토그래퍼
- 김희준
- 스타일리스트
- 최진우
- 헤어
- 재황(에이바이봄)
- 메이크업
- 최지선(에이바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