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성인이 된 신인 여배우가 연기와 몰입의 전율에 눈뜨기 시작했다. 부모인 조니 뎁과 바네사 파라디의 명성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자신다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안다. 차분하고 현명한 릴리 로즈 뎁 (Lily–Rose Depp)의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려 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저는 인터뷰에 능숙했던 적이 없어요.” 만난 지 몇 분이 지나자 릴리 로즈 뎁(Lily–Rose Depp)이 털어놓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사는 파리의 아파트 근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한 말이다. 구멍이 난 흰 리복 스니커, 삐죽하게 내민 입술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평범한 면 드레스 차림으로. “저는 이런 상황에서 수줍음을 많이 타요. 너무 긴장해서 그래요.” 겨우 스무 살을 갓 넘긴,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이 여배우는 그러나 좋은 매너를 갖춘 호감형 인물로 알려졌다. 그 평판은 그녀를 만나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직접 전화를 걸어서는 정중하게 사과하며 만나는 시각을 30분 연기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조니 뎁이고 어머니가 바네사 파라디라면, 인터뷰 현장에 30분쯤 늦는 게 큰 결례는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긴장하고 있는 그녀를 보면, 어떤 기자라도 릴리 로즈 뎁이 왜 평생 대중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분야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는지 의아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 몇 번의 인터뷰를 보면 그녀는 사생활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 외에 별로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다. 생일 파티를 연 장소에 대해 별 악의 없이 가벼운 질문을 던지면, 답을 얼버무리며 “음, 제 친구 집 같은 데서…” 라고 말하는 식이다. 릴리는 명성이라는 것이 ‘엄청난 걱정거리’를 안겨준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끊임없이 걱정거리에 시달려야 하는 직업을 선택한 걸까? 몇 년 전 처음으로 연기의 맛을 본 이후, 그녀는 연기를 평생의 일로 삼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했다. 캐릭터에 몰입하느라 진정으로 자의식을 느끼지 않는 유일한 장소가 영화 촬영장이었기 때문이다. “연기를 할 때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할 필요가 없죠, 내가 거기 없는 셈이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녀의 전략이 무엇이든 효과를 거두고 있는 모양이다. 작은 영화 두 편에서 단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후, 그녀는 이제 깊이와 범위 모두에서 제법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2019년 여름 미국에서 개봉한 로맨틱 영화 <페이스풀 맨(A Faithful Man)>에서 그녀는 루이스 가렐을 사랑하는 미친 스토커를 연기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감성과 성적인 매력을 발견해가는 젊은 여성의 복잡미묘한 모습을 연기했다. 2020년에 개봉할 묵직한 마약-카르텔 스릴러 <드림랜드>에서는 헤로인을 밀매하는 오빠(아미 해머)를 둔 피폐한 중독자 역을 맡았다. 지난가을 공개된 넷플릭스의 대형 사극 <더 킹: 헨리 5세>에서는 의지가 강한 공주 카트린 드 발루아 역을 맡아 티모시 샬라메, 로버트 패틴슨과 함께 열연을 펼쳤다.
LA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대화 중에는 경쾌한 캘리포니아식 신조어를 남발하지만 북미 관객에게 그녀는 여전히 미스터리한 존재다. 주로 누구의 딸 혹은 모델로 알려진 수수께끼의 인물인 것이다. 릴리는 자신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셀레브리티 부모의 방침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2012년에 이혼하고 말았지만,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릴리와 동생을 최대한 멀어지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저는 이 일을 하기로 선택했고, 그 대가로 무엇이 따르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더 어릴 때는 선택조차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열여섯 살 때 샤넬 안경 광고로 경력을 시작했다. 샤넬 향수인 넘버 5 ‘로’(N°5 L’Eau) 광고 촬영장에서는 하루 종일 몽환적이고 흐릿한 분위기 속에 있었다. 패션 관련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자면, 릴리는 순식간에 스타가 된 신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부모와 비교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조니 뎁을 ‘우리 아빠’라고 말할 수 있는 특권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왔다. “그 사실 덕분에 제 활동이 좀 더 쉬워질 수 있겠죠. 전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네요. 하지만 솔직히 어려운 점도 조금 있어요.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죠. 제 부모님은 그들 나름대로 놀라운 아티스트들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저 자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제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릴리는 자신이 전형적인 쌍둥이자리라고 설명한다. 한 몸에 두 명의 다른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뜻이다. 그녀의 한 면은 열정적으로 열심히 생활하는 미국인이다. 점심시간 동안 친구들을 차에 태우고 핀치 타코나 포퀴토 마스로 달려가는 소녀 말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여름휴가를 보낸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인 어머니의 21세기 버전처럼 보였을 거라고 말한다. 바네사 파라디는 열네 살에 첫 히트곡 ‘Joe Le Taxi’를 냈고, 나중에 샤넬의 여러 광고에 출연했다(만약 새장 안에서 검은 깃털을 입은 파라디가 그네를 타고 휘파람을 부는, 장 폴 구드의 1991년 코코 샤넬 광고를 보지 못했다면 지금 당장 검색해보라). 릴리는 불어로 말할 때면 얼굴 전체가 순간적인 변화를 겪는다. “‘불어에는 표정과 소리로만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어요.” 이어 릴리는 시들해진 눈알 굴림, 뿌루퉁함, 참을 수 없이 숨을 내쉬는 듯한 과장된 표정을 연달아 지어 보였다. 자신의 성격 중 프랑스인 같은 면은 ‘사물에 대한 어떤 태연함’이라고도 말한다. “제가 모든 것에 대해 태연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인이 가지고 있는 가벼움과 삶의 환희 같은 것은 항상 지니려고 해요. 그들은 인생을 잘 즐기는 종족이거든요. 바로 그 점이 제가 프랑스와 가장 연관되어 있다고 느끼는 부분이에요.”
릴리가 성장하면서 그녀의 내면은 두 자아를 가진 쌍둥이자리답게 순수한 소녀의 모습과 당돌한 여성의 모습으로 양분 되고 있다. 자신이 연기한 격렬하고 괴팍한 캐릭터로부터 단서를 얻은 덕인지, 최근에는 당돌함과 당찬 모습이 더 자주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페이스풀 맨>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에서 10대인 이브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일하는 파리의 사무실에 나타나, 사람들 앞에서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자위할 때면 당신 생각을 한다고도 말한다. 그 캐릭터는 ‘스스로를 맹렬하게 확신하며, 원하는 것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릴리가 설명했다. 영국 헨리 5세의 왕비이자 프랑스 샤를 6세의 딸인 카트린 드 발루아, 즉 그녀를 전보다 더 페미니스트처럼 보이게 한 인물을 연기하는 동안에도 이러한 영향은 마찬가지였다. 릴리는 카트린의 어머니가 남편 샤를 6세의 심각한 정신병 때문에 ‘닫힌 문 뒤에서 왕국을 지배한 것 같다’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 딸이 ‘주변의 남자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길렀다고 덧붙였다.
릴리는 캐릭터에 필요한 만큼 감정적으로 깊게 침잠하는 일에서 연기의 전율을 찾는다. 그녀는 마치 스위치처럼 자신의 기술을 켜고 끌 수 있는 다른 배우들을 존경하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그런 방식이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제게는 영혼을 완전히 드러내놓는 취약한 접근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더라고요.” 그녀는 그러한 연기 접근을 통해 도달하는 정신적 상태가 일상의 걱정을 잊을 수 있는 일종의 도피처라고 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피부와 머리카락이 상하고 못나 보인다? 그럼 ‘됐어, 그만해. 넌 지금 그 캐릭터에 들어와 있는 거야’ 식이다. “연기를 하면서 예쁘게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죠. 누구나 얼굴 앞에 카메라가 있다면, 처음에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완벽히 잘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갈수록, 저 자신에 대해 품는 의문은 점점 줄어들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릴리는 파리지앵 같지 않은 포옹을 하며 자신은 보통 자기에 대한 잡지 기사를 읽지 않으려 애쓴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그녀를 인터뷰한 사람은 그녀가 짐작도 못할 충격적이고 거짓으로 가득 찬 인터뷰 기사를 써도 되는 자격을 얻은 셈 아닌가! 이런 농담을 하자 릴리가 웃어 보임과 동시에 프랑스 여교사처럼 고루한 ‘쯧쯧’ 소리를 내면서 손가락을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오, 그러면 읽어봐야겠네요.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글
- CHRISTOPHER BAGLEY
- 포토그래퍼
- TIM WALKER
- 스타일리스트
- Sara Moonves
- 헤어
- Malcolm Edwards(@ LGA Management
- 메이크업
- Sam Bryant(@ Bryant Artists)
- 네일
- Yuko Tsuchihashi for Chanel Le Vernis(@Susan Price NYC)
- 세트
- Nicholas Des Jardins(@ Stree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