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불타면 숯이라는 정수가 남는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물의 마지막 상징적 모습이자 죽은 듯 보여도 생명력을 머금은 존재. 파리로 향한 30년 전부터 이배(Lee Bae)는 숯의 가능성과 함께 했다.
지난해 연말, ‘숯의 작가’ 이배가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 기사장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프랑스 정부가 예술분야에 공헌한 자에게 내리는 훈장의 가치와 기준을 나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집 안 곳곳에 가족의 건강을 염원하며 어머니가 놓아둔 작은 숯덩이를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정인데 검정만은 아닌 색, 거칠되 위협적이지 않은 질감, 비일상적이지만 은근히 스며드는 친밀함. 파리를 근간으로 활동하는 이배는 지난 30년 동안 설치, 조각, 회화 등으로 숯을 탐색하며 숯과 함께 했다. 약1년 전, 생 폴 드방스에 위치한 미술관인 매그 파운데이션에서 루이 비통 크루즈 쇼가 열렸을 때, 그곳에서 전시 중인 숯 작품의 어둠과 빛은 웬만 한것에 홀리지 않는 패션 피플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했다. 현재 베니스의 빌모트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 중인 이배가 새로운 화두를 가슴에 안고 잠시 한국을 찾았을 때 그를 만났다. 올 연말이면 그는 그를 충분히 사랑해주는 프랑스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곳, 미국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이배의 작업실은 파리, 고향인 경상북도 청도, 그리고 경기도 고양, 이렇게 세 군데 있다. 청도 작업실에는 숯이 가득하다는데, 잠시 한국에 온 그를 만난 장소는 그가 평면 작업을 주로하는 고양의 작업실이었다. 거대한 먹물 방울이 퍼지는 형상은 잭슨 폴락이 하듯 먹물을 뿌린 결과가 아니다. 붓으로 정교하게 그려 얻은 것이다.
근대 미술과 현대 미술, 모더니즘과 컨템퍼러리에 대하여
오늘 이 작업실에 언젠가 작가님과 만난 적 있는 마크 테토가 다녀갔죠. 그는 배병우나 구본창 작가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 컬렉터이기도 해요. 자신이 아는 프랑스 인들은 단색화를 비롯해 이배 작가의 작품을 굉장히 좋아한다면서, ‘이배는 현재 글로벌 미술 시장의 BTS’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웃음). K-POP이 한국 외 문화권의 마음을 건드린 것처럼, 작가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동한다’는 표현을 쓰더군요. 하하. 서양 미술에는 사실 단색화를 이해할 수 있는 구조가 거의 없어요. 그들이 단색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다른 게 아니라 ‘현대미술’에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 때 단색화 붐이 일어나니까 유럽에서도 ‘그런 새로운 미술이 있다더라’ 식으로 관심을 가졌죠. 프랑스 인의 경우 자기 나라에 이브 클랭이라는 걸출한 화가도 있었기 때문에 단색화에 거부감이 별로 없긴 할 겁니다. ‘클랭 블루’라고 자기 이름을 붙여 특허까지 낸 블루로 캔버스 전체를 덮은 인물이죠.
작업실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하시나요? 아주 규칙적인 편입니다. 파리에서도, 한국에서도, 보통 아침 9시경에 작업을 시작해서 저녁 7시까지 합니다. 제가 학교 미술 교사를 하다가 1989년, 서른 셋 즈음 파리로 갔어요. 그때부터 규칙적으로 작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규칙적인 일상에서 오는 힘이라는 게 분명히 있죠? 예술의 요건 세 가지가 있어요. 에스프리(영감과 정신), 애티튜드(태도와 자세), 그리고 프로세스(과정과 방법). 애티튜드는 작가의 감성과 취향을 따르지만, 프로세스는 지속적으로 쌓이고 축적되어가는 것, 그래서 논리적인 영역에 해당합니다. 근대미술에서는 에스프리에 비중을 크게 뒀죠. 작가는 매일이 아니라 영감이 떠오를 때만 그림을 그리는 식이어서 감동을 얻기 위해 여행 다니고 방황도 하고 그랬어요. 반면 현대미술에서는 균일함과 일정함이 중요합니다. 작품이 오늘은 좋았다가 내일은 나쁜 식이면 안 되고, 완성된 작품 하나하나에서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읽을 수 있어야 해요. 수공업 성격의 근대와 산업화된 현대의 차이점이 그겁니다. 그래서 현대미술에서는 근대에 비해 방법론, 프로세스가 굉장히 중요해요. 어쩌면 결과 자체보다 ‘어떻게 만드느냐’에 해당하는 그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균일하고 일정한 프로세스를 통해 작가의 세계성을 완성하는 현대미술. 팝아트가 한 예시겠네요. 결과물은 참 얄팍해 보이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게 메시지를 만들었죠. 근대는 메시지보다 에스프리가 중요한 때였고요. 현대에서는 방법론이라는 하나의 논리를 가지고 과정을 충실하게 잘 짜놓으면, 결과가 저절로 퀄리티를 갖추게 돼요. 작가 스스로 자기의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고, 그 시스템이 바로 그의 메시지가 되는 겁니다.
기자들은 온갖 장르의 예술가만 만나면 ‘영감’에 대해 묻는 존재거든요. 그건 구시대적인 질문이었군요(웃음). 예술을 바라보는 이가 예술 자체에 경외심과 호감을 가지면, 자연히 작가의 정신성에 관심이 가죠. 그건 좋은 현상입니다. 기자뿐이 아니라 일정한 교양과 지성을 갖춘 많은 한국인이 예술을 대할 때 경외심을 갖더군요. 다만 한국은 역사적으로 ‘근대’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어요. 왕조 시대에 선비니 양반이니 따지다가 바로 ‘컨템퍼러리’로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 사이 시기를 식민지로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저는 우리나라가 근대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게 큰 아픔이라고 여깁니다. 어떤 답을 찾을 때, 근대와 현대 사이에서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최첨단 하드웨어와 구시대적인 소프트웨어가 혼재된 사회상이 떠오르네요. 이런 경우가 있어요. 한국에서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 어려운 여건에서 유학을 거쳐 뛰어난 과학자로 금의환향했다고 쳐요. 첨단 산업의 중요한 연구자로, 매끈하고 세련된 신식 아파트에 살면서. 그런데 그런 아파트 거실 안에 소가 풀 뜯고 있고, 초가집 앞에 시냇물이 흐르는 목가적인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생활이나 과학에 관한 모든 것은 초현대의 중심에 있는데, 가슴 깊은 곳에는 근대가 없는 아득한 어느 옛날의 정서가 있는 겁니다. 생활 속 테크놀로지와 목가적인 그림 사이. 그건 나쁘다기보다 괴리감이 크다는 것이죠.
머리로는 현대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몸은 근대를 경험하지 못한 거군요. 집단적인 무의식이나 감성이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텐데, 우리 사회에서 뭔가 어긋나는 듯한 현상의 이유를 거기서 찾을 수 있겠네요. 물건 하나를 선택하거나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도 그 사람의 감성이 근저에 흐릅니다. 그런 것들이 한 사회의 생활 양식이나 문화 수준을 만들어가고요. 그런데 근대라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현대로 오지 못한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현상과 이유를 연결시키는 데 장애가 발생하는 거죠. 외국 생활을 하다 보니 특히 그런 면에 대한 생각이 많아져요.
파리에서 30년을 사셨죠. 그간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그만큼 안과 밖의 격차를 더 예민하게 느끼셨나 봅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호감을 갖고 있는 몇몇 문화권 중에 한국이 포함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대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의 거대한 결핍감이 그걸 극복하려는 노력과 의지, 특유의 열정을 만들었고, 바로 그런 데 외국인의 관심이 향하고 있어요. 그들은 한국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한국인의 생각을 읽고 싶어 합니다. 한국인이 차근차근 근대를 밟아간 유럽의 역사와 예술을 익히려는 경우는 결핍으로 인한 끌림일 수 있어요. 영양이 부족할 때 링거를 맞는 것처럼요.
링거를 맞을 때도 처방이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에게 없었던 근대와 그로 인한 문제점에 접근하는 법을, 우리와 다른 문화권에 살면서 체득하셨나요? 저는 바깥에서도 외국인, 한국 안에서도 아웃사이더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저도 모르게 안팎을 자꾸 비교하게 되니까요. 사회 문제에 대해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간 보이고 느끼는 것 중 하나가 한국은 남성 위주의 사회라는 점이었어요. 남성 위주, 그건 근대의 특성이고 근대를 거친 문화권에서는 이미 예전에 끝난 일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 얘기하고, 최근에야 페미니즘 운동이 태동했잖아요.
국내 어느 대학교 총장이 자기네 미대를 세계적 수준의 미대로 만들고 싶은데 가능성이 있겠냐고 물은 적 있어요. 그건 가능성이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안 되는 일도 아닙니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데 실천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했더니 의지가 있다고 하더군요. ‘의지가 있어도 개인만의 의지로는 힘들 것’이라고 다시 말했더니 그럼 어떻게 하면 될지 제 생각을 물어요. 제가 말했죠. “여자 교수를 60% 정도로 늘리십시오. 그리고 미술을 전공한 교수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교수를 30% 정도, 외국인 교수를 40% 정도까지 채우십시오.” 이건 제 생각이 아닙니다.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을 배출하는 전 세계 유수의 미대들 시스템이 그래요.
여성 할당제나 지방 출신 할당제 같은 정책이 생겨도 당장은 뽑을 사람이 많지 않겠죠.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와 다른 사회를 거친 인물이 늘어날 거고요. 그렇기도 하지만, 이미 준비된, 다 완성된 사람을 기용하기는 원래 어려운 일이에요. 제가 시골에서 과수원집 아들로 자라서 압니다. 잘 익은 사과는 시중으로 운송할 수가 없어요. 조금 덜 익은 사과가 가장 좋아요. 그래야 누군가의 밥상에 올라갈 때 제일 맛있는 상태가 되거든요. 시스템은 다 꼴을 갖춰놓고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려고 하면 만들어지는 것, 그게 시스템이에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작가님도 ‘근대에 대한 결핍’ 때문에 깊고 넓은 역사를 지닌 유럽에서 예술을 익히고자 했나요? 1980년대 후반이면 미국 유학을 생각했을 법한데 왜 파리를 택하셨어요? 처음엔 미국으로 갔어요. 머릿속에는 ‘세계 미술의 중심에서 현대미술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 해외로 나갔죠. 그런데 실제는 달랐어요. 제 머릿속에 있던 그 현대미술이라는 게 사실 근대미술이었다는 걸 깨달았죠. 뉴욕, LA에서 크고 작은 전시와 미술관을 보면서 아주 감명을 받았는데, 그 감명이 너무 강렬해서 겁이 날 정도였어요. 제가 거대한 기계 안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 파리에 가니까 그곳은 기계 같지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살아 있었어요. 인간적이고, 차별도 적었고. 충돌 없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잘 섞여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파리에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인종의 용광로라는 이미지는 미국이 갖고 있는데 의외네요. 클래식한 파리와 팝아트적인 뉴욕의 차이였을까요? 사실 프랑스는 ‘컨템퍼러리’가 아니었던 겁니다. 프랑스는 근대주의, 그러니까 모더니즘적인 의식이 강한 나라였고, 제가 본 미국이 바로 컨템퍼러리였던 거죠. 하지만 그 시절 외국에 나간 한국인으로서는 미국이 컨템퍼러리하다는 개념 자체를 인식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 서울에 살면서, ‘컨템퍼러리’보다는 ‘모더니즘’을 더 입에 올리는 것 같아요. 모더니즘은 참 마법 같은 단어예요. 우리나라에서 ‘모던한 인테리어’가 얼마나 각광받는지 아세요? 화보를 만들 때도 ‘모던하게 풀자’고 하면 그 추상적인 말 한마디에 갑자기 확 안심이 돼요. 그렇게 해야 정답인 것 같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모던이라는 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나 하나의 논리와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방식을, 이성 등등까지 다 투입해서 만들어진 결과거든요. 그러니까 ‘모던하게 하자’는 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공감이 되어야 하고… 그런 분명한 답이 있는 것이죠. 반면 ‘컨템퍼러리’는 답이 아니에요. 모던이 이미 경험해온 것에 대한 거라면 컨템퍼러리는 수많은 의문을 가지고 여전히 실험하며 진행 중인 것이에요. 그 컨템퍼러리를 뒷받침해주고 안심시켜주는 게 모던인데, 우리는 모던에 약한 셈이죠.
근대와 현대, 그러니까 모더니즘과 컨템퍼러리를 인지한 후 어떤 결론을 내리셨나요? ‘미국이 문제가 아니라 컨템퍼러리라는 필터를 통과해야 하는구나’ 깨달았습니다. 프랑스에서 제가 영양분을 얻으면서 견고해지긴 했지만, 현대 사회의 작가로서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현대미술이라는 거대한 필터를 통과할 수 있을까 질문이 생겼어요. 앞으로 그 물음을 안고 도전해야 합니다. 전 세계의 뛰어난 작가들이 뉴욕을 들락거리는 건 단순히 뉴욕이라는 특수한 장소성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컨템퍼러리 아트’의 현장에 들어가고 싶어서죠.
수년 전 <더블유>와 인터뷰한 이우환 작가도 유럽과 미국의 차이에 대해 얘기했어요. 작가가 한국과 일본에서 바로 미국으로 진출하긴 어렵다, 자신도 유럽에서 오래 버텼기 때문에 뉴욕 구겐하임에서 전시할 수 있었고, 백남준 선생 역시 독일을 기본 무대로 해서 오랜 시간 미국을 오갔다고요. 예술가는 예술을 위해 역사적 배경이 있는 유럽권에서 단련할 필요가 있다고 보시나요? 아,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미국으로 바로 진출해서 예술적 성과를 얻기가 어렵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과거에는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같은 게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세계의 눈이 향하고 있죠. K–POP만 놓고 생각해봐도 그렇죠. 신기한 점이 하나 떠오르는데, 1970년대 한국에는 물감 만드는 회사나 캔버스 천을 만드는 공장도 없었어요. 그런데 단색화라는 게 태어났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한국 단색화를 본 해외 평론가들이 대체 한국에서 그런 작품을 그 시대에 어떻게 했는지 놀라고 감탄해요. 단색화의 내용과 방법론, 형식 등과 유사한 미술이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도 아주 유행했거든요. 미술인끼리 교류했다거나 한국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때도 아니었는데.
몇 년 전 세계 미술 시장에서 한국 단색화가 주목받을 때, 마크 로스코 등의 색면 추상도 같이 언급되곤 했죠. 저는 그런 현상이 동시대성이라고 봐요. 이건 제 스타일 비유입니다만, 한 시대를 사는 서울 쥐와 시골 쥐는 취향이 비슷할 거예요. 시골 쥐가 서울에 안 가봤다고 해서 마냥 촌스럽다고 하기 어렵달까요. 물론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누군가와 비교 불가한 느낌을 안겨줍니다. 보고 있으면, 이상할 정도로 푹 빠져들어요. 관념이나 추상 같은 걸 들먹일 게 아니라 그냥 밖에서부터 자신을 뒤집어씌운다는 느낌. 그런 작품은 오늘과 내일 만든 결과물이 다른 미술이 아니라 정확한 레시피가 있는 작업입니다. 1970년대 한국에서는 방법론이나 레시피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는데, 누가 그걸 보고 퍼뜨린 것도 아닌데, 그 시대 작가들이 해냈단 말이죠.
작가님 역시 단색화 작가로 불리기도 합니다. 해외에서 단색화 바람을 체감하셨어요? 지금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한국의 1세대 작가 대다수가 제 세대의 선생님이셨어요. 저는 그들의 제자니까 2세대라고 할 수 있고, 저 역시 단색화가 유명해진 덕을 본 사람이에요. 유럽 곳곳에서 개인전을 하면 ‘한국에서 온 이배라고 있는데, 나름대로 숯을 가지고 독특한 미술을 한다’고 바라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저 작가의 스승과 문화권을 봐도 그렇고, 숯으로 저런 작품을 하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는 인식을 만들어준다는 거죠. 제 작업이 다른 문화권의 누군가에게 생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불로부터, 숯으로
작가님의 대표 시리즈인 ‘Issu De Feu’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면 가장 좋을까요? 한국 언론에서는 ‘불의 근원’, ‘불에서부터’ 등으로 많이 쓰고, 평론가 심은록 선생은 ‘불에서 나온’이라고 합니다. 저는 ‘불로부터’라고 불러요. 불이 만들어낸, 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숯이니까요. 사실 그것도 적확한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고 한국말로 옮기기가 아주 어려워요. ‘불의 근원’이라고 해도 뭐 나쁠 건 없겠습니다, 제 생각에는요.
숯덩어리로 설치 작업을 하거나 숯을 캔버스에 접합한 다음 표면을 연마해서 평면 작업을 하시죠. 사포질을 하면 숯이 다 바스러질 것만 같아요. 아뇨, 숯이 연약하고 깨지기 쉽지만 그렇게 바스러질 정도는 아니에요. 숯이라는 게 나무를 태워 만든 거죠. 밀폐된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듯이 굽는데 그 열기가 한 1000도까지 올라갑니다. 그 정도의 뜨거움으로 타고 나면 본래의 순수한 것, 탄소만 남아요. 재하고는 다릅니다. 숯은 그 물질이 순수하게 남는 것이고, 재는 숯까지 다 타버리고 나서 그 물질의 물성이 없는 상태이죠. 그래서 다 타버리고 물성이 남아 있지 않은 재는 희고, 숯은 검습니다.
‘Issu De Feu’ 시리즈 중 표면을 연마한 평면 작품을 보면, 표면이 매끄럽게 빛 나는 부분도 있고 해서 저는 처음 봤을 때 자개장이 연상됐어요. 그냥 검정이 아니라 여러 빛을 머금고 있는 검정요. 숯이 컬러 면에서는 단조로우니 컬러풀한 구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으세요? 많이 있죠. 지금도 많이 생각하고 있는데, 조만간 그런 계기가 주어질 수도 있고요. 저는 유럽에서 알려진 작가지만, 미국에서는 올해 첫 전시를 앞두고 있어요. 11월에 뉴욕 페로탱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할 예정입니다. 미국에 이제 겨우 제 메시지를 알리는 수준인데 지금 이것저것 하면 거기서는 제가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오늘날은 뛰어난 작품 한두 점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성이 그 작가를 결정짓거든요.
처음 어떻게 숯과 만나셨어요? 숯이 예술화된 계기요. 우리 집사람은 그 얘기 하지 말라고 해요. 예술적이지 않은, 일상에 관한 부분이라서(웃음). 파리에 가서 하루 10시간 이상 작업을 하는데, 물감을 쓰면 그 재료비를 감당하지 못 해요. 손가락만한 튜브 물감 하나가 한국 돈으로 2만원 정도 했어요. 또 현대 미술에서 캔버스가 좀 큽니까?(웃음) 별생각을 다 하다 어느 날 숯을 샀는데, 500원 정도 숯 한 봉지면 일주일 동안 너무 행복한 거예요. 재료 걱정이 없는 것만큼 작업할 때 행복한 게 어딨겠어요.
그렇게 신이 나서 숯과 살다가 평생을 함께 뒹굴거라는 확신이 들던가요? 숯을 서양에서도 많이 씁니다. 화실에서 숯으로 작업을 시작한 초기,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숯으로 그림을 그리네’ 하면서 관심을 가졌어요. 그곳이 공동 화실이었는데 어느 날 유명한 평론가가 다른 일로 화실을 찾는다더군요. 주변에서 그랬죠, 프랑스 사람은 워낙 질문하기 좋아하니까 나에게도 왜 숯으로 작업하느냐 분명 물을 거라고. 그때부터 일주일 동안 ‘숯은 무엇인가’ 고민 했어요. ‘나는 거대한 먹의 세계, 검정 수묵의 문화권에서 왔기 때문에 숯을 쓴다’고 거창하게 갖다 붙여야 하나?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다 점점 숯이 나를 위한 하나의 매개자가 되게끔 하는 과정을 거쳤죠.
한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단색화 스승들로부터 회화 영향을 받으셨을 텐데, 숯 작업에 있어서는 레퍼런스나 자극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겠어요. 없었죠. 하지만 모든 예술가란 현실을 있는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어떻게든 예술적으로 해석하려고 고민합니다. 모든 게 다 예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예술적인 틀에 현실적인 저것을 넣어볼 수는 없을까, 그래서 그 냉랭하고 옴짝달싹도 하기 어렵게 매여 있는 현실에 상상력을 가미하지요. 저는 예술이 여행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생각은 멀리 내보내고 멀리 저 밖에 있는 것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행위요. 안과 밖을 연결하는 여행. 이우환 선생님도 돌을 보고서…
돌요? 돌과 철판을 보고서 예술로 연결하셨죠. 세자르는 버려진 기계 조각이나 고철을 가지고 작품화했고. 그러니까 무언가를 일상적인 사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예술적인 틀 안에서 보려고 노력하는 일이 습관이에요, 예술 하는 이는. 숯을 쳐다보면서 ‘이건 뭔가’ 하다 보면 어릴 적 목탄으로 데생했던 일, 옛날에 한국에서 애를 낳으면 처마 밑에 숯을 매달아놓거나 간장 담글 때 숯을 넣던 일, 숯을 갈아 만든 동양화의 재료인 먹 등등 일상 안에서의 숯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그런 일을 지속하고 확장하면서, 숯과 관련된 일상에 자꾸 상상력과 예술이라는 향기를 입히는 거죠.
숯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면서 무엇을 발견하셨나요? 숯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그 이상성을 다 벗어버리면 결국 숯으로 남는 게 아닌가… 어떤 사물이 가진 일상성과 현실성을 벗고, 가장 에센스만 남는 것. 어떻게 보면 숯이 모든 사물의 마지막 상징적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숯은 죽은 듯 보여도 사실 굉장한 에너지를 머금고 있죠. 다시 불이 될 수 있고, 다시 타서 에너지를 낼 수도 있고. 그 점이 숯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이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한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작가 커리어를 이어가는 데 동양적 재료인 숯이 유리하게 작용한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동양적 재료라는 점이 유리한 것만은 아니에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프리카 토속 가면을 두고 그게 ‘우리 문화’라고 자꾸 얘기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게 아무리 좋아도 하나의 이국적인 취향으로 거리를 두고 볼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 유명한 가면은 아프리카라는 틀에 갇혀버리죠. 저도 그런 우려를 했어요. 동양적이라고 너무 부각하는 건 별로 안 좋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근래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한국 작가들의 큰 흐름에서 봤을 때 ‘이 재료가 여러 문맥상 타당하다’라고 생각하는 시선은 있겠죠. 그게 문화권에 대한 호기심을 부를 수도 있고요.
동양, 숯, 이배 작가, 그리고 서양. 그 점들을 어떻게 연결해 가셨나요? 숯 자체로는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없어요. 숯이 어떤 감성과 어떻게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서양의 논리로는 한국, 일본, 중국의 문화를 공감하지 못하는 게 많거든요. 예를 들어 ‘여백’, ‘기운생동’ 이런 말은 서양 미술 사전에는 없는 용어예요. 현대 사회가 어쨌든 서양인이 기틀을 만들었기 때문에 동양은 서양을 이해하는 게 학습됐지만, 서양은 동양을 이해할 수 있는 코드가 적죠. K–POP은 그 원료 자체가 동양적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미술은 전통이나 관습이 만들어온 삶의 양식이기 때문에 상대를 이해시키려면 적절한 매개가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 매개가 되는 건 서양적인 방법론이에요. 숯을 짓이겨 캔버스에 바르면서 마티에르 효과를 내죠. 하지만 서양 미술의 마티에르가 질감을 만들면서 표면으로 튀어나오는 식이라면, 저는 캔버스에 미디엄이라는 것을 발라 숯가루가 안으로 스며드는 효과를 냅니다. 화선지에 먹물을 먹이는 것처럼요. 똑같은 그림을 캔버스가 아닌 화선지에 그려 서양인에게 들이밀면 누구도 그걸 이해하려고 들지 않아요. 그러니까 동양의 작가가 서양에서 통하려면 개인이 속한 문화권의 정체성을 담으면서도 서양의 프로세스로 설명이 되는, 그런 보편성 역시 지녀야 합니다.
오랜 시간 숯과 씨름해보니, 숯은 어떤 물질이던가요? 결국은, 숯은 자연물입니다. 유화물이나 인공물이 아니라 자연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한마디로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카오스의 세계’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자연이라고 하면 흔히 내 시선과 우리의 관념이 다가갈 수 있는 영역을 말합니다. 전통 가옥에서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저 앞에 보이는 산 같은 것. 한마디로 인간의 제도권 안에 있는 대상이죠.
서양에도 물론 토스카나 지방의 잘 정돈된 올리브나무 풍경 같은 자연이 있지만, 서양에서 자연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개념은 야생에 가까워요. 불어의 소바주(Sauvage) 말이죠. 우리 아버지가 농사를 하시며 그랬습니다, ‘훌륭한 농부는 땅을 잘 제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땅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라고요. 땅의 속성을 이해하고 그에 순응하면 땅이 농부를 도와주는데, 농부가 땅을 제도하려고 들면 그게 농부 말 안 듣습니다. 땅이라는 건, 카오스의 세계에 있는 물성은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아요. 저 역시 숯을 제 맘대로 할 수 없어요. 대신 숯을 이해하려고 할 때 숯이 비로소 자기 속성을 드러내더군요. 아주 우아하거나 화려할 때도 있고, 때로는 정결하고. 그러다 보니 숯이 가장 숯답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늘 고민하죠.
사람 말도 안 듣는 그 어렵고 귀한 대상과 30년을 보내셨어요. 숯이 싫어지는 때가 있었겠죠? 2000년대 초반, 그걸 슬럼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숯이라는 물성에 제가 너무 매여 있어서 저를 좀 자유롭게 하고 싶었어요. 그 시도 중 하나로 ‘제스처’가 나왔죠. 숯가루와 미디엄을 섞어 캔버스 위에 휘갈긴 듯한 형상, 단순한 형태나 기호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다름 아니라 제 몸이 움직인 흔적을 뜻합니다. 제스처라는 건 신체를, 몸짓을 상징해요. 표현된 형상이 주체가 아니라 작가의 몸이 주체이죠. 완성작 자체보다 제가 몸을 움직이는 과정이 핵심입니다.
제스처가 드러나는 작업을 함으로써 몸이 만들어낸 에너지와 그 과정을 담아 내신 거군요. 청도의 작업실에는 대형 설치 작업이 많은 반면, 지금 이 작업실에는 제스처 작업물이 가득합니다. 서예가 연상되는 작업이에요. 조금 의도한 바는 있는데, 완전히 서예는 아니에요. 서양인은 서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거든요. 현대에서는 비물성적이고 제스처가 빠진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면도 있는데, 단색화에서는 제스처가 큰 의미를 갖습니다.
브루스 나우먼의 전시를 보다 뛰쳐 나오다
숯에 대해 고민하고 변주를 꾀하는 세월 동안, 절망했다거나 왜 이 예술을 지속하고 있나 생각한 적은 없나요? 예술이 운명이라거나 너무 흥미롭고 즐거워서, 라는 생각은 저에게 별로 없어요. 콤플렉스도 많죠. 제 삶이 너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예술가인데 사회 현상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은 아무렇게나 그려도 그림이 되는데 왜 나는 안 될까, 뭐 별의별 고민을 합니다. 절망한 경험이라고 하면 작년 11월 뉴욕에서 브루스 나우먼이라는 작가의 개인전을 봤던 때가 떠오르네요. 제가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앞두고 있으니 그냥 이 사람은 개인전을 어떻게 하고 있나 가서 봤어요. 그런데 전시를 보다가 중간에 뛰쳐나왔습니다.
왜요? 전시를 둘러보기 시작하자마자 감동이 밀려오는데, 어느 순간 숨을 못 쉬겠는 거예요. 못 견뎌서 막 뛰쳐나왔어요. 눈에 보인 식당에 들어가서 에스프레소 한잔 마셨습니다.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면, ‘내가 뉴욕에서 전시회를 한다는 게 너무 허황된 건 아닐까. 내가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전시를 해도 되는 걸까.’
그거 아주 영화 같은 장면이었겠는데요! 프랑스 문화 훈장 받은 작가를 호흡 곤란 증상으로 내쫓아버린 그 전시는 대체 얼마나 대단했길래요? 다시 들어 갈 용기가 안 나서 며칠 뒤 가보려다가 혹시 잘못된 감정에 괜히 휩쓸리지 않을까 싶어 또 하루를 건너뛰고… 그러다 며칠 후 다시 가서 봤는데, 정말 꾹꾹 참으면서 봤습니다. 이 사람은 진정 위대하구나 싶더군요. 회화, 조각, 설치, 비디오, 뭘 하든 섬세함과 우아함과 기타 등등 너무나 다양한 걸 다 지녔어요. 그러면서 어떤 건 ‘저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게끔 너무 하찮게, 관념 같은 걸 다 빼버렸어요.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좋아 보이는 미술 앞에서 감동을 받고 힘을 느낄 수는 있죠. 그런데 나우먼은 달라요. ‘예술적’이라는 냄새를 다 버렸어요. 그런데도 섬세하고 강하고 예민한 예술적 요소를 다 집어넣었더군요. 그런 거 보고 있는데 사람이 환장 안 하겠어요?
경지에 도달한 예술가가 내놓을 수 있는 게 그런 건가요? ‘컨템퍼러리’와 제대로 대면하신 셈인가요? 어떻게 보면 그제야 비로소 미국 현대미술에 대한 구체적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미국이 돈 많고 파워 있는 강대국이고, 페이스북이 태어난 나라고, 뭐 그런 인상이 있긴 했지만 브루스 나우먼을 보고서야 진정 ‘미국은 이런 사람을 만들어낸 곳이구나’ 확 와닿았어요. 그건 경지라기보다는… 그게 개인의 힘 같지는 않아요. 뛰어난 사람 혼자 예술 한다고 해서 이뤄질 일이 아니었어요. 뭐랄까, 나우먼은 감동을 주려고 하지 않아요. 테크닉이니 뭐니 다 빼버리고 너무나 평범하고 하찮은 걸, 그 딴에는 그런 걸 넣어둔 거죠. 그러니 더 감명 깊어요, 그 역동성이. 그때 휘트니 뮤지엄에서 앤디 워홀 대규모 회고전도 하고 있었는데 그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군요.
그 강렬한 경험이 올해 11월 뉴욕 페로탱 갤러리에서 하실 개인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겠네요. 네, 이건 함부로 덤빌 게 아니구나, 정말 다르게 생각해야겠구나 합니다. 제가 작년에 파리 페로탱에서도 개인전을 했어요. TV와 라디오, 저널 등 유럽 언론 150여 군데에서 전시 소식을 다뤘어요. 상업적으로도 성과가 있었죠. 그때 전시한 작품을 그대로 뉴욕에 가져왔을 때를 상상해봤습니다. 이런 말 하면 파리 사람들이 저를 미워할 수도 있는데, 그 작품 그대로 뉴욕에서 전시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 같지가 않더군요. 프랑스에서는 나 별로 관심 없다는 의미를 아주 좋게 표현하면 ‘세 누보’라고 해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누보’여야, ‘New’여야 관심을 보여요. 나우먼 전시를 보고 나오면서 그 생각이 딱 들더군요. 미국은 뒤집어놓은 거예요, 유럽의 모든 가치관을. 컨템퍼러리하다는 의미를.
그래서 뉴욕 전시에 관해 어떤 결정을 내리셨나요? 페로탱 뉴욕이 상당히 큰 공간이에요. 그런데 작품을 딱 네 점만 전시하려고 합니다. 최근 그곳에서 전시한 작가는 100점쯤 걸었다고 하더군요. 제 네 점 중 제일 큰 캔버스는 13미터에 5미터 정도 규모가 될 것 같고, 조각 설치는 5미터 정도 높이가 될 듯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야산 숯을 요즘 굽고 있는데, 숯덩어리 하나의 지름이 제 키만 해요.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는군요. 일을 하는 한, 경력과 나이에 상관없이 도전은 계속되는가 봅니다. 연세 많은 분들도 그래요. 며칠 전에 이우환 선생님과 통화할 일이 있었어요. 현대미술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뉴욕의 디아 비컨에서 얼마 전에 전시를 시작하셨어요. 그 거대하고 상징적인 공간을 이우환으로 채웠다니 대단한 일이죠. 정말 축하합니다, 했더니 답변이 멋졌어요. “별로 칭찬받을 만한 정도는 아닌데, 그래도 지금 막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우환 작가가 지금 막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 사람이면 다른 인생들은 대체 얼마나 어떻게 열심히 해야 하는 걸까요…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도 ‘아, 예술가구나’ 했어요.
작가 생활을 통해 이배에게 현재 남아 있는 교훈은 뭔가요? 작가라는 존재는 외부를 탓할 수가 없어요. 뭐든 자기 책임입니다. 모든 게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늘 적극적이어야 하죠. 물론 이건 작가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고 일반적인 삶에 적용되기도 할 테지만, 현실이 발목을 잡을 때가 어렵죠. 제 그림은 제 나이 마흔다섯 전에 팔린 적이 없어요. 예술가에게는 그런 현실을 밀고 나갈 힘도 필요하거든요. 현실에 빠져들면 안 되는데, 또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돼요. 어떻게 보면 현실과 비현실, 초현실, 혹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사는 기분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아닌 사람도 꿈과 현실을 같이 안고 있죠. 꿈이 없는 현실을 갖고 있으면 현실이 지옥 같고 재미없을 거예요. 꿈은 있는데 현실이 못 받쳐준다면 늘 괴로울 겁니다. 그 사이의 밸런스를 찾는 일은 특히 나 작가에게는 말 그대로 피부에 와닿는 체험이에요.
그럼 작품이 처음 팔리기까지 어떻게 버티셨나요? 돈도 필요하고 정신도 필요한 일이잖아요. 배고픔은 시간이 지나면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열망이 일어나지 않는 게 더 힘들죠. 예를 들어 배가 고픈 경우와 머리가 고픈 경우, 고통은 배고픔 쪽이 클 텐데 충격은 머리 고픔 쪽이 더 강한 것 같아요. 열망을 이루려고 애쓰는 와중에 배가 고픈 건 그런대로 잘 넘길 수 있었어요. 물론 꿈과 열망이라는 걸 구체적으로 정해놓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죠. 결국 그런 말은 다 애매할 수 있고, 그저 삶에는 속에서 뭔가 울렁거림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젊은 작가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하십니까? 교류할 시간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할 수 있다면 해외에 가능한 한 자주 나가라고 합니다. 바깥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라고요. 현대에서 제일 안 좋은 타입의 작가는 작업실에 처박혀 작업하는 작가예요. 한국에는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외부와 소통하길 두려워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작가가 움직이면 화랑도, 컬렉터도, 그 주변 친구도 움직이게 됩니다. 내가 밖으로 자주 나가면, 밖에 있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올 일이 생겨요.
양혜규 작가 같은 분은 나가서 아예 잘 안 들어오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웃음). 양혜규, 서도호 같은 이들은 아직 밖에서 할 일이 많을 거예요. 요즘에는 한 작가의 작품을 안 보고 전시나 소장처 같은 이력서와 데이터만 봐도 그 작가가 어느 정도 읽힙니다. 작가로서의 성실함을 포함해서요. 그런 데이터로 보면 그 두 사람만 한 작가가 한국에 없을 겁니다.
요즘 작가로서의 큰 관심사는 뭔가요? 뉴욕에서 제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게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컨템퍼러리라는 세계적인 관문에 들어갈 수 있나 없나에 대한 테스트가 되겠죠. 뉴욕에는 이제야 저를 알리는 수준이지만, 그 과정을 넘어서면 제가 훨씬 자유로워질 거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 포토그래퍼
- 신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