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치열한 시절을 지나 마침내 맞이한 가장 찬란한 순간에 대해 담담하게 회상하는 멋진 여자들을 만났다. 우리 생애 가장 기쁜 순간, 그리고 나와 당신의 행복론.
배우 이연희, 일상의 발견
초여름 만난 이연희는 조금 그을린 듯 보였다. 제주도에 다녀왔다고 했다. “여유롭게 카페 야외 테라스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책을 봤어요. 저도 모르는 새 햇빛을 가득 받아서 한쪽 팔만 타 있더라고요(웃음).” 여유와 재충전. 요즘 그녀의 삶을 요약해주는 단어다. 은희경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 시간은 가장 소중한 루틴. 고등학생 때 데뷔한 이래 성실한 배우의 삶을 통과해오며 이연희는 비워내는 것과 사소한 것이 주는 기쁨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2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어요.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허무함이 드는 순간이 찾아오더라고요. 내려놓고 싶은 적도 제법 있었고요. 정말로 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래도록 고민했어요. 제일 중요한 건 가까운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함께 즐기는 여유인 것 같아요. 많은 것을 하지 않더라도, 삶의 작은 부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이연희는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국제갤러리, 유영국 작가, 에곤 실레와 장 미셸 바스키아. 사진첩과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미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미술을 전공해서 저도 좀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거침없이 그리는 천진한 아이처럼 저도 무언가 그려보고 싶었어요. 몇 번 그림을 그려보니까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더라고요.” MBC 예능 <나혼자 산다>에서 활짝 웃는 이연희의 모습을 보는 것도 반갑지만, 작품 속에서 만날 또 다른 얼굴을 기다린다. “영화 <미스 슬로운>에서 제시카 차스테인이 맡았던 로비스트,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에요(웃음).” 배우가 매력을 느낀 캐릭터에 그녀의 다가올 미래를 투영시켜본다.
리듬체조 마스터 손연재의 1분 30초 행복론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13m² 마루 위에서 수구를 손에 쥐고 활짝 웃으며 새처럼 날아오르던 선수를. 한국 리듬체조의 역사를 새로이 쓴 손연재. 2016년 리우올림픽 이후 그녀는 깊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은퇴 후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결국 제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떠올렸어요. 리듬체조는 모든 운동의 기본과도 같은 운동이에요. 스트레칭, 몸의 근력과 밸런스,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세 교정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성장기 아이들에게 너무 좋고요. 올림픽에서만 하는 운동이라는 인식을 조금 더 넓혀보고 싶었어요.” 올해 3월 한남동에 오픈한 리프스튜디오는 리듬체조의 이로움을 널리 알리고 싶은 그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유튜브 채널 ‘연재월드’에는 치열한 세계를 통과해온 한 사람의 평화롭고 다채로운 인생의 면면이 고르게 펼쳐져 있다. 분홍색 발레복을 입은 꼬마들 사이에서 꿀 떨어지는 미소로 환하게 웃고 있는 선생님, 트레이닝복을 입고서 유연하면서 파워풀하게 카밀라 카베요의 하바나를 커버하는 댄서, 엄마와 다녀온 제주 여행기를 브이로그로 담은 딸, 모두 손연재의 지금이다. “선수 시절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훈련하고 밥 먹고 뒤돌아서면 또 훈련하고···. 은퇴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요즘은 눈뜨면 제가 좋아하는 일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껴요.” 오로지 리듬체조만을 생각하던 20여 년의 시간 동안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일까? “보통 사람들이 추측하기를 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을 상상하겠지만 제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1분 30초 연기를 끝내고 나서 5초가 흐른 뒤, 그 찰나의 짜릿함이에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엄청난 경험이에요.” 한국에 사상 첫 리듬체조 금메달을 안긴 2014년 아시안게임. 다가오는 10월 손연재는 그곳에서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일곱 살에 처음으로 리듬체조 대회에 나갔어요. 무서워서 안 하겠다고 했던 기억이 선명한데 그런 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니까 마침내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어요. 수많은 대회를 통해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저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어요. 꼭 선수를 꿈꾸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1분 30초의 경험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리듬체조 국제 대회를 매해 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죠.” 손연재에게 잊지 못한 순간을 선사한 장소, 인천 남동체육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다시 정사각형 무대를 누비는 모습이 눈에 환하게 그려진다.
발레리나 강수진, 김리회, 박슬기, 발레의 기쁨
발레는 부드럽고 우아하게, 때로는 파워풀하고 강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종합예술이다. 그 아름다운 무대를 만드는 세 사람을 만났다.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국립발레단을 이끄는 강수진 예술감독, 수석 무용수 박슬기와 김리회가 그 주인공. 선후배, 단장님과 단원,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고 동경하는 관계. 무엇으로 수식하든 세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 대화, 제스처 하나하나가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강수진 단장이 먼저 운을 띄웠다. “아름다운 무용수, 직원, 스태프와 하나 되어 서로서로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건 저에게도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저도 오랫동안 발레를 해왔고 무대 위에서 삶을 사는 동안 너무 행복했어요. 요즘에는 무용수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발레리나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한 행복이죠. 두 분 다 발레에 대한 사랑이 정말 놀라워요.” 요즘 국립발레단 안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김리회 수석 발레리나가 출산 후 복귀를 알린 것.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직 몸을 만들어가고 있는 단계이고, 아마 8월 <백조의 호수>로 무대에 다시 설 것 같아요. 다섯 살 때부터 발레를 시작했는데 부상당했을 때 빼고는 한 번도 1년 넘게 쉬어본 적이 없어요. 요즘 뭐랄까, 발레를 다시 처음 배우는 느낌이 들어요.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부터 모든 것이 전부 새로워요. 무대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내가 옛날에 무대에 섰을 때 어떤 느낌이었지? 하고 그 감각을 되살려보고 있어요.” 사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출산 후 무대로 돌아오는 무용수가 거의 없었다. 김리회 발레리나는 강수진 단장의 사려 깊은 도움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조언 덕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80여 명의 단원들로 이루어진 국립발레단은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다. 특히 지난 5월 울산에서 처음 공개한 창작 발레 <호이랑>은 연출, 대본, 안무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긴밀하고 유연한 협업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한국적인 미와 소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으로 크게 호평받았다. 주인공 랑 역할을 맡은 박슬기 수석무용수가 이렇게 회상했다. “여자도 남자들 사이에서 파워풀한 춤을 출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지고지순한 여성상을 깨는 작품이라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팔 길이만 한 커다란 칼을 들고 춤추는 신이 많았는데 휘청거릴 정도로 컨트롤이 쉽지는 않았어요. 평소보다 상체 근육을 굉장히 많이 썼고 준비하는 과정 동안 남자 무용수들의 춤과 움직임을 연구했어요. 첫 무대에서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열심히 준비한 공연을 잘 끝내고 수많은 관객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릴 때, 무용수들은 가장 뭉클함을 느껴요. 그때가 가장 큰 환희의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오는 11월 창작 발레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는 <호이랑> 공연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다. 세 사람이 말한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느껴볼 차례다.
모델 장윤주의 사랑과 평화
장윤주는 지금 파리에 있다. 자전거를 타고 비틀비틀 좁은 골목을 누비고 작은 서점에 들어가 동화책 읽는 딸 리사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기도 한다. ‘한 달간 가족과 함께 파리에서 살아요. 일하고 여행하며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그녀가 인스타그램에 남긴 메시지다. 청담동 어둑한 지하 스튜디오에서 여행의 이유를 물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오래도록 일하고 싶어요. 30대 때 제가 참 많은 일을 했더라고요. 방송도 시작했고 라디오도 오래 진행하고 영화도 찍었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고, 제가 생각해도 정말 많은 일을 했네요(웃음). 40대가 찾아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고민을 요즘 해요.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새롭게 동기를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집을 떠나 가장 오랫동안 머문 도시가 파리이기도 하고요.” 여전히 생생하고 여유로우며 몇 마디 말만으로 순간의 공기를 환하게 밝히는 사람. 장윤주의 고유한 에너지는 언제나 기쁨으로 수렴한다. “20대에는 무대에 올라갔을 때 가장 행복했어요. <베테랑> 영화 홍보를 위해 무대 인사를 다녔을 때도 정말 기억에 남아요. 함께한 사람들도 워낙 좋았지만 작품이 많은 사랑을 받았고 거기서 오는 기분 좋은 자신감이 확실히 있었어요. 기쁨의 형태는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요즘 저는 가정 안에서 가장 따뜻하고 안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그런 모멘트를 느끼고 있어요. 딸아이가 요즘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럴 수도 있을까?’ 싶을 만큼 너무 예뻐요.” 장윤주는 딸과 함께 산책하며 ‘리사(LISA)’라는 곡을 썼다. 이 곡은 카를라 브루니가 스포티파이에 공개한 30곡의 페이버릿 리스트 가운데 20번째에 수록되기도 했다. 롤링스톤스, 지미 헨드릭스, 비틀스 등 전설적인 뮤지션 가운데 쏙 들어 있는 ‘리사’라는 이름은 귀엽기도 뭉클하기도 하다. 여러 갈래의 길 위에서 종횡무진으로 달려온 그녀지만 무대 위에서 노래할 때 장윤주의 온도는 한결 따뜻해진다. “모델로서 런웨이 위에 설 때면 마치 폭탄처럼 에너지를 한 번에 ‘빵’ 하고 터트려야 하죠. 쨍하고 팝하고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니까요. 반면에 뮤지션으로서 무대 위에 서면 훨씬 더 따뜻해요. 관객과 감성적으로 교감하는 느낌이 들어요. 음악은 제게 잔잔하게, 깊숙하게 오래도록 스며드는 존재예요.” 사랑하는 가족, 평화롭고 꾸준한 일상, 새로운 비전. 장윤주의 지금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 여행 후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할 장윤주의 새로운 챕터에는 사랑과 평화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
플루티스트 최나경, 음악의 힘
플루티스트 최나경을 서울에서 만난 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최근 그녀의 스케줄을 읊자면 다음과 같다. 텍사스 주 댈러스, 오스트리아, 대전, 부천, 강릉, 광주, 청주. 그리고 다시 8월에는 뉴욕으로. “제가 1년에 공연을 대략 100번 정도 해요. 비행기로 이동하는 시간을 빼면 거의 매일 공연 스케줄이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가끔은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하는 공연도 있고 어느 때는 몇십 명 앞에서 하는 작은 공연도 있죠. 그런데 큰 공연이든 작은 공연이든 간에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연주를 했을 때 그 기쁨이 정말 커요. 그런 공연을 하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환희와 희열감을 느끼죠. 어려운 곡을 만나서 연습하다 마침내 그것을 넘어섰을 때는 행복감이 더 크게 다가와요. 어렵게 얻은 기쁨이랄까요?” 플루트는 생명을 불어넣는 악기다. 관 속의 공기를 진동시켜 세상 가장 청명한 소리를 낸다. 천상의 소리, 천사의 악기, 그런 수식어가 적절할까? “프루트 하면 예쁘고 여리디여린 악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굉장히 파워풀한 소리도 낼 수 있어요. 때리는 것처럼 과격한 소리, 구멍을 모두 닫고 확 불면 나는 신기한 소리, 목소리와 악기를 동시에 내서 만드는 괴물 같은 소리 등 고정관념을 깨는 테크닉도 많고요. 그런 연주를 들려주면 사람들이 가끔 충격을 받곤 하죠(웃음).” 최나경 연주가는 유튜브 채널, 인스타그램, 그리고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자신의 노하우와 경험을 나누는 데 적극적이다. “플루트를 몇십 년 연주한 사람끼리 만나도 어떻게 하면 소리를 잘 낼 수 있을지 대화해요. 25년 정도 한 것 같은데 여전히 어렵고 고충도 많아요.” 최나경은 듣는 순간 행복해지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음 따뜻한 슈만의 곡, 힘들 때는 깊이 있는 말러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2주 전에 빈에서 브람스와 슈만의 곡을 녹음했어요. 함께 연주한 피아니스트와의 합이 너무 잘 맞아서 뼛속까지 전해오는 행복감을 느꼈고, 삶 전체가 감사함으로 다가왔어요. 어떤 곡을 힘들게 익히고 마지막에 그걸 넘어서면 더 큰 기쁨이 다가오는 것 같아요.” 오는 가을 그녀의 11번째 음반이 나온다. 음악이 주는 강렬한 힘이 그 안에 담겨 있다.
- 피처 에디터
- 김아름
- 패션 에디터
- 김신, 이예진, 고선영
- 포토그래퍼
- 김영준, 박종원
- 헤어
- 김선희(이연희), 한결(손연재, 강수진, 김리회, 박슬기, 최나경), 장혜연(장윤주)
- 메이크업
- 최시노(이연희), 최수일(손연재, 강수진, 김리회, 박슬기, 최나경), 이나겸(장윤주)
- 스타일리스트
- 이윤미(이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