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이방인’으로 돌아오는 이센스 인터뷰.
힙합계의 해태 혹은 유니콘, 풍문으로만 떠돌던 미지의 그것. 언제 현현할지 알 수 없었던 이센스의 새 앨범이 마무리되면서 그의 날도 개었다.
‘그XX아들같이’. 지난주 선공개된 그 싱글, 특히 뮤직비디오가 인상적이다. 스탠딩 코미디와 힙합이라니. 앨범은 잘 마무리 되고 있나? 새벽에, 드디어 완료했다. 아침 6시 돼서야 누웠다.
이센스와 밝고 맑은 이야기를 하면 신선할 것 같아서 ‘최근 가슴 벅찼거나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이 있나요?’ 같은 질문 하려고 했다. 바로 어제 새벽에 그랬겠다. 그렇다. 마스터링 넘기기 전에 1번부터 15번 트랙까지 쭉 들었는데, 괜찮다. 그동안 음악이 싫어지는 순간도 많았다. 왜 음악 하는 게 즐겁지 않고 이렇게 괴롭기만 하나 싶어서. 막상 끝나고 나니 또 이런 음악 저런 음악 하고 싶은 게 떠오른다. 개운한 상태다, 지금.
7월 안에 나올 앨범 타이틀이 <이방인>이다. 나오지도 않은 앨범명이 온라인상에 그렇게 자주 회자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앨범을 대체 언제 낼 거냐고 재촉하는 ‘기-승-전-이방인’식의 ‘드립’이 상당하던데. 그런 현상은 당신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나, 혹은 거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나? 부담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모두 내 탓이지. 환영받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앨범이 곧 완성될 것만 같아서, 언제쯤 발매할 거라고 내 입으로 뱉곤 했다. 인터넷에 앨범 발매가 자꾸 늦춰지는 것과 관련한 ‘밈’이 많이 돌아다니는 건 나 스스로 가속화시킨 면이 있다. 내가 나불거리지 않았어도 부담은 똑같이 느꼈을 거다.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니 나에게 어떤 이미지가 형성돼 있었다. ‘빨리 앨범 내서 다 죽여주세요’ 이러는데 대체 누굴 죽이라는 건지(웃음).
힙합계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목마른 양들의 이미지를 봤다. 오히려 욕이면 무시해버릴 수 있을 텐데, 청원과 성원을 외면할 수도 없었을 테고. 1년 6개월 동안 그 안에 있으면서, 나에 대한 기대를 제대로 체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 나왔더니… 나를 과장해 띄우는 상황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와, 저 기대감을 어떻게 채우지? 저들의 기대는 과연 뭘까? 감옥에 갔다 나온 사람이니 깊은 무엇이 생겼을 거라는 시선도 있는 것 같고. 나한테 다들 뭔가를 바라는 것 같은데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그러다 싱글에 대한 안 좋은 피드백이라도 받으면 잊고 있던 부담감이 되살아났다. 사람들의 기대와 시선이 기분 나쁠 일은 전혀 아니고, 다만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당신의 경험이 드라마와 판타지를 자아낸 면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힙합 신에서는 시끌벅적하게 거론된 전 소속사와의 이별도 있었고, 수감 생활 전 작업해놓은 정규 1집 <The Anecdote>가 명반으로 통했고. 그 앨범이 2016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랩&힙합 음반으로 선정되면서 ‘옥중 수상’이라는 진기한 일이 벌어졌다. 이센스에 대한 기대감은 그 앨범 이후 눈에 띄게 증폭했다. 감옥에 있을 때 발매된 1집이 마침 우울한 감정을 담고 있어서 그 이미지가 박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내게는 물론 예전부터 자리 잡은 우울함이 있다. ‘나는 왜 아버지가 안 계실까’, ‘우리 집은 왜 부자가 아닐까’ 싶던, 어릴 적부터 쌓인 감정이 고름처럼 터져 나와 극대화된 게 이전 앨범이다. 하지만 내 인상이 아픔과 진지함 쪽으로만 쏠리는 건 참 싫었다.
그래서 새 앨범은 그런 인상을 바꿀 만한 분위기인가? 애초 시작할 때 의도는 ‘예상과 편견 다 뒤집고 마음대로 하자, 콘셉트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신나는 곡도 만들면서’였다. 그런데 노는 음악을 만들어보려 해도 그런 바이브가 나오질 않는 거다. 내 삶이 축제 같지 않아서 그런 건 못 만들었다. 결국 이번 앨범은 그간의 오르내림을 담은 결과물이 됐다.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이야기가 또 들어갔다. 음악을 쥐고서 후딱 내놓지 않으면, 시간이 좀 지나 단점을 찾자면 그게 무조건 눈에 보인다. 그럼 엎고, 또 엎고 그러는 과정을 반복했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으려 한다.
<The Anecdote> 덕분에 어려운 영어단어를 하나 알았다. ‘일화, 개인적인 진술’이라는 말은 그 앨범이 담은 자전적인 콘셉트를 드러내는 단어였다. <이방인>은 어떻게 해서 선택된 단어인가? 우선 그 안 에 있으면서 내가 병신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처음 3개월 동안 면회 오는 사람이 너무 적은 거야. 그래서 열 받았지.
첫 손님은 누구였나? 우리 바나(BANA) 대표. 일주일에 한 번씩 꾸준히 왔다.
거의 옥바라지 느낌인데…. 그런 셈이다. 한동안 화가 나다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내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랑과 의리를 보여줬다면 그들이 날 보러 왔겠지 싶더라. 내가 잘못 살았구나, 나가면 이제 잘 살아야겠구나 다짐했다. 출소 2주 전 대표와 통화하면서 그랬다. ‘다음 앨범 제목 정했어, ‘손님’으로 할 거야.’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이 반겨줬으면 좋겠고, 괜찮은 손님이고 싶어서. 손님은 어디 갈 때 선물 들고 가니까 나도 그런 선물 같은 걸 만들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앨범명은 아니지만 ‘손님’이라는 곡을 만들었다.
손님을 떠올렸는데 현실은 이방인이 된 기분이던가? 그동안 세상이 격하게 변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뭔가 잘 모르겠더라. 한 6개월 뒤면 앨범을 낼 거고 그때 되면 자연히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지, 그때까지는 처박혀서 내키는 대로 감정을 노래하자 생각했다. 그렇게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왔다. 굳이 어떤 무리로부터 나를 떨어뜨려놓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세상 속에 섞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고른 제목이다. 그 상태가, 좀 좁은 세계에서 지낸 시간이 어쩌다 보니 2년 정도 갔다.
어떤 사건의 전후 현상을 판단하려면 일단 인간관계부터 비교해보는 게 빠르다. 내가 관계를 커트했든, 커트당했든. 그곳에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에 변화가 있나? 네. 네. 그전에는 교류한 사람이 많았는데, 이젠 연락 안 되는 사람도 많다. 물론 오랜만에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는 나를 보고 속으로 ‘계속 두문불출하나?’ 생각할 수도 있을 거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며 살다 또 누군가와 마주치고, 시간이 되면 지금 이야기하는 이런 속마음을 꺼내놓기도 하고. 그런 사례가 하나하나 늘고 있다.
혹시 ‘데스 노트’ 비슷한 거 작성하진 않았나? 상실감, 배신감, 슬픔, 분노, 고통, 몰두, 치욕 같은 감정을 한 번이라도 사무치게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만한 노트 말이다. 어떤 계기로 인간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때 내 안에서 스르르 정리되는 인물 리스트 같은. 전화번호를 바꿨다. ‘다시, 새롭게 살자’는 생각을 그 안에서부터 했기 때문에. 서로 뻔히 다 아는 사람들인데 누구랑은 연락을 끊고, 누구랑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런 구분은 좀 웃긴 것 같았다. 번호를 바꾸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도 생겼고.
가까운 사람은 당신의 분위기나 느낌이 전과 달라진 게 있다고 말하기도 하나? 글쎄, 나는 똑같은 것 같다. 그냥 더는 스물세 살이 아닌 거지.
지금 내가 얼마든지 사랑과 의리를 주고 믿어도 되는 소중한 사람은 누군가? 바나 사람들. 이게 자칫 다른 사람에 대한 욕으로는 안 들렸으면 좋겠는데, 내가 거친 시간과 변화를 옆에서 지켜보며 힘을 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사람에 대해 벽을 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는 나를 멀리서 지켜보며 쟤 잘 살아야 할 텐데 그럴 수도 있겠지.
괴로운 시간을 살 때 역지사지하고 자기 반성하는 건 좋은데, 화살이 자신에게로만 향하면 이중고를 겪기 쉬운 것 같다. 나한테 화살이 향했을 때 아파하기만 하다 결국 무너지면 좋은 인생이 아닐 것이다. 그간에는 무너지다 다시 불쑥 일어서고, 좀 들쑥날쑥한 편이었 다. 가까운 사이인 XXX의 심야와 이런 이야길 했다. 음악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것만큼 별로인 게 없다고. 나는 사실 앨범이 잘 안 되면 내 인생도 안 풀릴 것 같다는 생각에 다소 사로잡혀 있고, 앨범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봐야 인생이 정리될 것만 같다. 내 인생이 먼저고, 음악이나 일은 다른 문제인데. 이번 앨범을 세상에 내놓고 나면 비로소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좀 변화할 것 같다는 기대가 있다. 음악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여야 한다. 이번 앨범이, 나의 어떤 ‘끝’이다.
그동안의 당신을 기록한 다큐 <I’m Good>을 보니 ‘클래식’을 남기고픈 열망과 고민, 창작자에게 당연히 따르는 부담과 조금은 덜어내도 되는 부담이 다 읽히는 것 같았다. 자기 점검도 심한 스타일 같은데. 원래부터 그런 인간이었나? 내가 피곤한가?(웃음) 원래 생각이 많은 편이긴 하다. 거기에 내가 굳게 믿고 있던 세계가 박살나는 경험을 두어 번 하면서 더욱 그런 인간이 된 듯하다. ‘랩을 잘하면 인기를 얻고, 인기를 얻으면 돈을 번다, 그럼 행복해질 것이다.’ 어릴 때부터 단순하게 믿던 이 세계가 박살이 난 후, 그게 내 탓인지 남 탓인지 자문 해보니 내 탓이 큰 것 같았다. 하나의 이상을 굳고 단순하게 믿고 있으니까 깨지기도 쉽달까? 그런 시절을 지나 이제는 ‘저거 가짜야, 쟤들 연예인이야’ 하던 대상과 내가 뭐 그렇게 다른가? 할 정도는 됐다.
부정적인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단순하고 기계적인, 작은 의식을 만드는 연습을 하면 좋다더라. 지난달 <더블유>가 인터뷰한 뮤지션 중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라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가 암 투병하다 돌아가신 충격과 상실감을 앨범에 담았는데, 괴로움을 벗어나려다 보니 ‘기계적인 것’에 관심이 가서 로봇에 대한 노래도 만들고 그랬다. 기계적인 것. 안 그래도 기어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뜨개질 같은 단순 행동을 반복하는 것도 정말 효과 있다고 들었다. 샤워하면서 물을 맞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사람도 많고. 단순해도 반복적인 행동이나 자극이 몸에든 머리에든 배면, 자기도 모르게 감각이 집중되는 거다. 나도 꼭 똥을 쌀 때 가사가 떠오르더라? 아, 나는 매일 아침일기라는 걸 쓴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같은 건가? 글 쓴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그냥 써야 한다. 남들에게도 추천하는 방법이다. 씻고 정신 깬 다음 말고, 눈 뜨자마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생각. 그 일기장이 일종의 정신과 의사 같은 대상인 셈인데, 의사 앞에서도 하지 못할 말이 쭉 나온다. 한 2주 지나서 다시 보면 가관이다.
예를 들면 어떤 내용이 있나? 두서없고 적나라한 내용이 많아서 지금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다. ‘똥 마렵다…’ 작업할 때도 가사가 전혀 안 나오면 아무 말이나 쓴다. ‘지금 카페다. 누가 보면 대단한 거 하는 줄 알겠지? 저기 지나가는 여자 예쁘다.’ 이러다가 아이디어가 탁 나오기도 한다.
안도 다다오나 데이비드 린치처럼 한 분야의 장인이 되면, 카페에서 낙서한 냅킨도 액자에 걸려 전시된다. 훗날 힙합계 클래식이 된 이센스가 전시를 하면 액자 너머로 이런 메모가 보이는 거지. ‘아, 똥 마렵다…’ 내 아침일기들, 죽기 전에 반드시 다 불태워야 한다.
몇 년 동안 이센스의 무거운 짐이었을 앨범도 마무리됐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뭔가? 여자친구? 아직도 나라는 사람에게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큰 만큼 그 비율을 낮춰줄 어떤 것도 다 좋다.
연애할 때는 이센스라는 구조에서 음악의 지분이 좀 줄어들었나? 음, 어쩔 수 없이 음악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니 연애가 다가오지 않지.
그래도 언젠가 까마득한 과거에 연애했던 시절에는 좀 다른 감성이 음악에 반영되던가? 나에겐 달달한 음악이 거의 없다. 그런 감정이 없지는 않지만, 나보다 그런 음악 잘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 헤어지고 나서의 찝찝한 기분 같은 걸 가사에 담은 적은 있는 편이다. 그런 건 고민하고 잴 것 없이 가사가 술술 나온다. 말하고 보니 역시 음악에 관해서는 머리로 하는 고민보다 실제 경험이 중요하다. 나는 말이 많고 말에 갇힌 사람이라, 말 짧은 사람이 멋져 보인다.
말이 많고 말에 갇힌 게 사실이라면, 당신이 관념에 몰입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몰입으로 인해 음악 하는 삶에 대해서 더 납득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 내가 무슨 자격으로 힘든 인생을 노래하나 싶을 때가 있다. 결국은 누워서 고민하다 머리 굴려 만든 음악을 작업 하는 인생 아닌가, 그게 뭐 대단하다고 고통을 보상받으려 하나 싶고. 우리 누나를 보면 느낀다. 은행에서 일하는데, 늘 어깨가 꽉 뭉쳐 있다. 애도 키워야 한다. 누나는 야근하는 날이면 몇 시간 자지도 못 하고 다시 출근해야 하는데, 새벽까지 작업한 날에는 다음 날 2시에 일어나도 되는 내가 인생의 고통을 이야기한다고? 돈은 소방관 같은 사람이 제일 많이 벌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끔 음악을 듣더라. 일단 일하자 하면서 누르고 지나쳤던 감정을 음악을 통해 되살리거나 풀기도 하면서. 우리처럼 누르기보다 자주 표현하고 사는 직업의 사람들은 사실 상대적으로 개운한 거다. 그러니까 자극도 더 빨리 받고, 조금만 뭐가 따가워도 너무 따갑게 느끼고. 그게 바로 음악이 아닌가 농담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 음악이라는 것을 잘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의미 있을 3분을 주자…. 그게 내 직업의식이라면 의식인 것 같다.
가끔 말 좀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나? 가끔이 아니라 매일 한다. 하지만 실제로 한 번도 말수를 줄여본 적이 없다.
솔직히 두려운가? 왜? 이미 사전 예약 판매로 끝장을 봤는데? 두렵지 않다. 다만 나는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데,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생각은 덜 하고 싶은 사람’이다. 더 나은 인간으로 가기 위한 과정을 이번 음악들에 잘 꺼내놨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 한 스텝을 밟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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