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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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와 나눈 TMI 인터뷰.

가장 트렌디한 음악 뒤에는 언제나 그레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프로듀서이자 비트메이커로 가사와 비트 사이를 날렵하게 누비던 그가 오랜만에 자신의 싱글 앨범으로 돌아왔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스펙트럼을 가진 그레이와 나눈 TMI 인터뷰.

네트 스타일의 베이지색 반소매 톱과 검정 사파리 셔츠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검정 스키니진과 팔찌, 부츠는 모두 생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 스톤 반지는 지방시 제품.

신곡 ‘TMI’ 덕분에 그레이에 대한 정보를 풍성하게 얻었다. 혈액형 A, 토요일을 좋아하고,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으며, 비냉보다 물냉, 근데 오이는 안 먹는 남자. 그레이 듣고 보니 까다로운 남자다(웃음). 사실 이 곡은 미세먼지에서 출발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지난 1~ 2월 사이에 만든 노래인데 당시 미세먼지 지수가 최악이었다. 살고 있는 집에서 보통은 롯데타워가 잘 보이는데, 유리창이 뿌옇고 그러니까 기분도 별로고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가사의 첫 줄이다.

그다음 구절은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본다고 했는데, 요즘 꽂혀 있는 콘텐츠가 있나? 넷플릭스에는 없지만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을 열심히 보고 있다. <브레이킹 배드>와 <프렌즈>도 너무 좋아하는 드라마다. 7월에 <기묘한 이야기> 새 시즌이 나온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다. 최근에 <어벤저스: 엔드게임>이 개봉한 기념으로 극장에 다녀온 후 그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좋아하는 마블 영화를 모두 다시 돌려 봤다. ‘마블 빠’여서 영화뿐만 아니라 후기와 분석하는 영상까지 다 찾아보곤 한다. 피규어도 좋아하지만 핫한 아이템을 모으려면 집도 팔아야 할 정도로 가격대가 높아서 시작을 안 하고 있다. 현실적인 사람이라 과한 취미 생활은 지양한다.

10을 벌면 8을 저축한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다. 예전에는 그랬지만 요즘에는 세금까지 감안하면 6에서 7 정도 되는 것 같다(웃음). 최근에 소속사의 펌킨 대표님이 돈을 그렇게 많이 모았냐고 놀라더라. 로꼬 어머니께서도 그레이는 어떻게 그렇게 돈을 잘 모으는지 궁금해하신다고 들었다. 앞으로도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싶다.

흰색 티셔츠와 검정 팬츠는 벨루티, 가죽 팔찌는 에르메스 제품.

그레이는 쉬지 않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처럼 보인다. AOMG 소속 동료들의 음악 프로듀싱뿐만 아니라 여러 래퍼나 뮤지션의 프로듀서, 피처링으로 촘촘한 크레딧을 보유하고 있다. 저작권협회에 175곡이 등록돼 있다고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기 번호표를 뽑아 들고 있는 뮤지션이 많을 것 같다. 오늘도 내가 만든 곡으로 누군가 녹음하고 있는 중이다.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아이돌 유닛의 곡을 작업하고 있다. 공동 작업으로 좋아하는 형님과 함께했는데, 아이돌 그룹과의 작업은 재미있으면서도 어렵다. 생각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이를테면 그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는 것까지 고려해 그런 부분을 상상하면서 만든다.

사이먼 도미닉이 그레이를 두고 ‘램프의 요정 지니’ 같다고 말한 표현이 인상적이다. 옆에서 살살 만지고 있으면 원하는 비트가 술술 나온다고. 평소 축적해둔 비트 저장고의 실체가 궁금하다. 누가 어떤 비트를 고를지 상상하면서 미리 만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일단 피아노로 멜로디를 만들고 거기에 맞게 드럼을 찍고 그렇게 살을 붙여 나가다 보면 뭔가 만들어져 있다. 그렇게 하나둘 만든 곡을 주변 래퍼에게 보내서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서로 작업이 시작되는 경우도 많다. 편집숍에 갔을 때 디스플레이가 잘되어 있는 옷을 상상해보면 된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잘 모르겠을 때 하나씩 입어 보면서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비트를 들으면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가사를 읽고 거기에 맞는 옷을 찾아주기도 한다. 쌈디 형 같은 경우 는 가사 표현이 정말 예술이다. 거기에 나도 영감을 얻어서 곡 작업을 시작한다.

다른 뮤지션의 프로듀싱과 본인의 음악 활동 사이의 밸런스 조절은 어떻게 하나? 같이 작업하고 싶었던 뮤지션이 ‘그레이’라는 옷을 입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느낀다. 좋아하는 뮤지션과 공동 작업으로 뭔가 만드는 과정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 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 반면 내가 전면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에 대한 갈증도 있다. 이번 ‘TMI’ 싱글 앨범을 계기로 올해 더 많은 곡을 발표하고 활동하려고 한다.

겨자색 실크 셔츠는 김서룡 제품.

옥탑방에서 음악을 만들던 시절 혹시 누군가를 가르쳐본 경험도 있나? 우원재가 학교와 동아리 후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수강생으로 처음 만났다. 학연, 지연이 아니라 <쇼미더머니> 시즌 6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거다. 거기서 완전히 스타가 되어 ‘시차’라는 곡을 함께 작업하게 됐다. 오히려 그 친구가 나에게 기회를 준 거다. 동아리 선후배였던 로꼬, 아프로(Apro)라는 친구도 옥탑방 시절 모두 내 레슨을 들었던 친구들인데 다 잘돼서 기분이 좋다.‘Real Recognize Real’이라는 말처럼 처음에는 전혀 친분 없던 친구들이 승승장구해서 프로 대 프로로 만난 거나 다름없다. 인복이 정말 좋지 않나?

최근에 음악적으로 신선한 자극을 준 누군가가 있나? 요즘 토로이 모아(Toro Y Moi)의 음악을 잘 듣고 있다. 처음에는 토로이 모이라고 발음하는 줄 알았는데 엘런쇼에 출연한 걸 봤더니 ‘또로이 모아~’ 이렇게 부르더라. 얼마 전에 ‘NPR Music Tiny Desk Concert’에도 라이브 영상이 올라왔는데 정말 좋아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도 올렸다.

KBS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피아노 한 대로 로고 송을 뚝딱 만들어내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그레이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악기다. 피아노를 능숙하게 잘 치는 건 아니지만 프로듀싱에는 불편함 없는 정도로 사용하고 있다. 건반 그 자체보다는 소프트웨어로 더 많은 것을 하고 있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에 집착한다. 건반을 소프트웨어에 연결하면 소리가 변하고 그것을 가공하는 데 재미를 붙이는 타입이다. 한번 라이브러리를 잘 만들어 두었더니 거기서 이런저런 재료로 요리를 잘하게 되더라. 트렌드 변화를 빨리 알아채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뻔한 소리보다는 다양한 가상 악기 프로그램에 관심을 두려고 한다. 뭔가 새로운 게 나왔다고 하면 먼저 해보려고 하는 스타일이다.

검정 셔츠, 파란색 가죽 베스트,
스니커즈는 모두 루이 비통, 프런트 지퍼 장식의 통 넓은 데님 팬츠는 GMBH by 매치스패션 제품.

‘그레이 = 트렌디’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힙합신의 트렌드세터~’ 김진표 형님이 <쇼미더머니> 때 그렇게 나를 소개해주더라(웃음). 너무 감사한 말이다. 새로 나오는 음악도 당연히 열심히 찾아 듣지만 옛날 음악도 좋아한다. 유행은 돌고 돌지 않나. 클래식한 90년대 R&B, 붐뱁, 네오솔 등 옛날 음악을 잘 이해하려고 한다. 그것들과 트렌디함이 섞여서 좋은 무언가가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너무 트렌드만 좇다 보면 오히려 뻔한 음악이 될 것 같 다.

2018년 한국 힙합 사상 최다 인원 51명이 참여한, 약 20분 러닝타임의 ‘119 REMIX’ 프로젝트(Mnet <쇼미더머니 777> 경연곡)는 프로듀서로서 그레이에게 가장 실험적이고 험난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녹음한 건 아니고 메일로 주고받아 진행했는데, 참여한 래퍼 모두에게 카톡으로 가사를 달라고 쪼아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 사운드 믹스 하면 다시 보내주고 수정 요청이 오면 해주고, 마지막에 렌더링하는 데만도 진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최대한 누군가의 수고를 덜기 위해 직접 모든 일을 했다. 아직까지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고 들었고, 특히 언에듀케이티드 키드나 염따처럼 요즘 핫한 래퍼들의 벌스가 주목을 받았다. 수익금이 모아지면 119 소방대원 단체 및 화재 관련 피해자분께 기부하는 취지의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성격이 꼼꼼하고 세심한 것 같다. 만약에 언젠가 영감이 떨어져서 음악을 그만두게 되면 AOMG의 직원으로 뽑아달라고 누누이 말하고 있다. 나에게 정산을 맡겨도 한 치의 실수 없이 잘해낼 수 있다.

핑크 터틀넥과 데님 팬츠, 스니커즈는 모두 프라다 제품.

한 방송에서 역술가로부터 ‘돈은 많지만 여자가 없다. 주변에 남자가 많다. 연애운이 좋아지는 시기는 2020년이다’라는 인생 조언을 들었다고? 내가 그래서 2020년을 기대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말하길 사주가 아니라 저주를 받은 것 같다고(웃음). 2020년 까지 아무도 사귀지 못하다니. 도대체 어떤 귀인이 나타나실지 기대가 크다. 202011일이 빨리 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어떤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나? 주관이 뚜렷하고 본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긍정적이고 음악을 좋아하는 분. 조건이 좀 많은가(웃음)?

한두 달 여유가 생기면 살아보고 싶은 도시가 있나? LA나 뉴욕 중 한 곳에 살아보고 싶은데, 날씨가 좋은 LA가 더 좋겠다. 하고 있는 일이 많아서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불안하지만 기회가 되면 한 달 동안 유럽 투어도 해보고 싶다. 작년에 영국 런던에서 AOMG의 단독 콘서트를 했는데 그때 런던에 처음 가봤다. 하루를 쪼개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건너가 반나절 동안 우버를 타고 에펠탑, 루브르처럼 관광명소를 순서대로 돌면서 인스타그램용 사진만 찍고 다음 행선지로 넘어간 기억이 있다. 다음에는 시간을 넉넉히 잡고 이탈리아, 독일, 영국, 스위스도 천천히 둘러볼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패션 에디터
정환욱
피처 에디터
김아름
포토그래퍼
안연후
헤어
태현(미장원 by 태현)
메이크업
미애 (미장원 by 태현)
스타일리스트
한종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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