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출신으로, 런던을 비롯해 전 세계를 유랑하는 일러스트레이터 티보 에렘(Thibaud Herem). 슈퍼 마리오의 루이지를 닮은 그가 파란 작업복을 입고 <더블유 코리아>의 카메라 앞에 섰다. ‘섬세함에 열정을 담다’라는 주제로 서울에서 열릴 세 번째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티보. 한 땀 한 땀 손으로 꿰매 완성한 오트 쿠튀르 의상처럼 한 줄 한 줄 세심한 손길로 완성한 그의 그림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했다.
오차 하나 없어 보이는 촘촘한 선으로 이뤄진, 완벽주의자 성향이 다분한 티보 에렘의 그림을 보다 보면 몇 개월씩 전 세계를 여행하고 머물 만큼 자유로운 영혼인 그를 좀처럼 떠올리기 쉽지 않다. 인터뷰 전 사석에서 만난 티보는 한글 연습을 하고 있는 자그마한 노트북을 펼쳐 보여줬는데, 그래픽으로 보일 만큼 곧은 한글 필체와 깔끔하게 써 내려간 글씨를 보며 그의 그림을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매력에 빠져 몇 달째 머물고 있는 그가 서울에서 벌써 세 번째 전시를 연다. 전시는 한남동에 자리한 국내 최초의 일러스트레이션 전문 갤러리 알부스에서 오는 12월 14일부터 두 달 동안 펼쳐진다. “이전보다 규모도 크고, 다양한 드로잉을 보여주려고 해요. 오리지널 작업부터 최근 한국에서 보고 그린 것들, 대중이 쉽게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크기의 그림, 그간 출판한 책과 그림이 그려진 접시 등을 선보일 예정이죠. 그림 속 디테일에 수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의미를 담아 전시 제목도 ‘Detail filled with passion’이라고 지었어요. 제가 작업하며 느끼는 감정을 대중과 공유하고 싶어요.”
인터뷰를 위해 티보는 전시 예정인 작품 네 점과 막바지 작업 중인 새로운 그림 몇 가지를 가져와 직접 설명도 덧붙였다. “네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린 작업을 선별해 가져왔어요. 먼저 웨스 앤더슨 영화 속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 그림은 제게도 특별한 작품이에요. 실제로체코에 있는 세 빌딩 스타일을 조합해서 완성한 그림이거든요. 두 번째로 나무가 있는 일본풍 건물 그림은 일본 솔로 쇼 때 선보인 건데, 실존하는 건물은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는 건물의 특징적 요소를 혼합하고, 나무를배치했죠. 제 책 <런던 데코>에 나온 작품인 영화관 그림도 가져왔어요. 제가 영국에 살 때 좋아한 옛 건물인데, 상영하고 있는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그려놨죠. (그림에는 히치콕의 <새>, <노인의 위한 나라는 없다>, <조스>, <프레셔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포스터가 그림 속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런던의 소호하우스 빌딩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전형적인 조지 왕조풍 건물이에요. 비율이 정말 완벽하죠! 색도 예쁘고요.” 예술적 시각으로 건축물을 보는 그를 가장 흥분케 하는 건 무엇일까? “균형, 비율요. 지극히 심플한 스타일의 건물도 제게 이야기를 건네거든요. 건물 전체의 균형을 보고, 그걸 그림으로 옮겼을 때 선과 그림자를 통해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낼지 거듭 생각하죠. 최근에 한국의 전통 건축물, 현대 건축물도 다양하게 보고 그렸는데, 지붕의 각도나 타일, 벽돌의 배치 등에서 나오는 특유의 비율감과 스타일에 매료됐어요.” 허구의 건물을 그릴 땐 그가 좋아하는 미학적인 조화가 폭발한다. “제가 보고 상상한 갖가지 흥미로운 특징을 모아 그리는 작업을 하다 보니 새로운 타입의 건물을 만들어내는 게 흥미롭더라고요. 건축학적으로는 말이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제 작업은 건물의 설계도나 평면도 개념이 아니잖아요. 전 건물의 ‘초상화’를 그려요. 건물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를 담아서 소통하는 거죠.” 언젠가 티보 에렘의 그림 속 건물이 실제로 세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건축을 공부하진 않았지만 건축 사업을 하신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건축가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그. 런던에서 살 때는 영국건축가협회(Royal Institute Of?British Architects)의 강연이나 콘퍼런스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현재 스튜디오도 건축기 친구와 공유하고 있다. “건축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건물에 심미적 접근을 하는 거죠. 요즘 건축물은 기능성이나 경제성에 더 집중하는 편이잖아요. 아르데코, 모더니스트 스타일 건물이 개인적으로 그리기에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제 작업에서 선과 그림자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건물의 대칭적인 특색이 중요하거든요. 슬릭하고 평면적인 모던한 건물도 그리기는 하나, 제 특기인 그림자를 사용할 수가 없어 자주 그리진 않아요.”
지난 11월 10일에는 청담동 서점 Paark에서 그의 책 <Raising a Forest> 사인회도 열었다. 런던에서 직접 80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기를 만큼 가드닝에 빠져 있다는 티보 에렘은 무(無)의 상태에서 씨를 뿌려 조금씩 자라나는 그 ‘창조’의 과정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는다. “지금 가장 오래된 나무가 5년 정도 됐는데, 키가 2m예요. 나무가 자라고 변화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재미에 빠져 있죠. 이름이 있는 나무도 있는데, 대부분 동물 이름을 붙여줬어요(웃음). 앞서 말한 빌딩처럼 전 나무의 ‘초상화’를 그려요. 이번 전시에선 나무에 관한 또 다른 책 하나도 공개할 예정이죠.” 나무 그리는 일은 극도의 섬세함을 필요로 하는 그의 건축물 작업에 일종의 해방감과 자유를 안겨다주는 초콜릿과 같은 행위다. “실재하는 나무도 그리고, 가상의 나무도 그려요. 나무나 관목을 그리면서 곧고 직선적인 선에서 벗어나 제 손과 머리에 휴식을 주는 셈이죠. 건물을 그릴 때도 식물과 함께 넣어 그리죠. 평소 4~5개 그림을 동시에 작업하는데, 그중 한 점으로 꼭 나무를 그려요.” 스스로 완벽주의를 추구한다는 티보의 첫 작품은 무려 8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당시 실수를 용납하지 못해 그림을 시작한 3개월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했다고. 하지만 그 경험은 그림자를 활용한 티보 에렘만의 테크닉을 확립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작품별로 각각 몇 시간이 걸려 완성했는지(부다페스트 호텔 그림은 650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기억할 정도로 꼼꼼한 아티스트 티보. 문득 그가 그림 속에 숨어 있는 한 줄 실수를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예전엔 실수하는 게 두려웠지만 이젠 극복했어요. 실수를 기억한다 해도 워낙 선이 많으니 나중에는 찾지도 못 해요. 그러니 관객도 알아채기 힘들겠죠?(웃음) 신기하게도 예전에는 스트레스로 여겨진 부분들이 끊임없는 그리기를 통해 ‘마음의 자유’로옮겨가는 걸 느꼈어요. 많이 그릴수록 전 더 자유로워지죠.”
- 패션 에디터
- 백지연
- 포토그래퍼
- 이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