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빈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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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죄 많은 소녀>로 강렬하게 각인된 이름 전여빈. 올해의 발견, 기억하고 싶은 얼굴, 자유롭고 잔잔한 자신만의 호흡을 보여주는 배우. 그를 몽환적인 공간 속으로
초대했다.

코트, 드레스는 미우미우, 진주 귀고리는 렉토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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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발견, 배우 전여빈을 만났다. 올해 이 배우에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와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영화 <죄 많은 소녀>의 개봉을 열흘 남짓 남겨둔 시점이었다. 전여빈은 이 작품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과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지난 9월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했다. 고통, 불안, 발악, 의심, 사랑, 복수, 연민.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내 머릿속을 부유한 단어들이다. 심연 속, 누군가 선뜻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이글거리며 폭발을 거듭한다. 서늘한 얼굴, 채도가 낮은 표정, 살기 어린 몸짓. 전여빈은 이 영화를 통해 한동안 잊기 어려운 비극적인 잔상을 남겼다. 친한 친구의 실종과 죽음, 선과 악이 불분명한 세계, 한 소녀가 감내하기에는 지독하고 잔인한 이야기들이 113분간 쉼 없이 스크린을 질주한다. 영화 속에서 죄와 짐을 오롯이 지고 가는 소녀, 영희 역으로 전여빈이 등장한다. 괴물 신인, 독보적 존재감, 압도적 아우라. 요즘 검색창에 그의 이름 석 자를 치면 쏟아지는 수식어다.

김의석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감독이 2년 동안 바윗덩이를 짊어지고 산 위를 올라가듯 괴롭고 치열하게 완성한 작품이다. 전여빈은 ‘처절하고, 함께 온몸으로 아플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였다’고 회상했다. “원래 사람은 아픈 존재인 것 같아요. 누구든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각자 아픈 구석이 있기 마련이죠. <죄 많은 소녀>는 그걸 정면으로 바라보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피하고 싶고 숨기고 싶은 인간의 본성을 여과 없이 끌어내죠.” 그렇기에 영화에 참여한 모두가 무겁지만 좋은 책임감을 느꼈다고. “감독님, 스태프들, 배우들 가운데 단 한 명도 허투루 임한 사람이 없었어요. 다들 너무 치열했고, 그래서 행복했어요. 엄청 뜨거운 현장이었죠. ‘이런 순간이 또 올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드레스는 질 샌더 by 육스, 귀고리는 구찌 제품. 반지, 팔찌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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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를 보고 나온 배우 문소리는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폭풍같이 몰아쳐서 약간 혼미한 상태에서 본 것 같아요. 제가 전여빈 배우와 작업한 적이 있어서, 전여빈 배우를 그래도 조금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힘이 넘치는 배우인지 미처 몰랐다는 생각을 하면서 봤습니다. 한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빈이 고생한 것 같아서 마음도 아프지만 너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줘서 굉장히 자랑스럽네요.”

작년 9월 개봉한 문소리 감독의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전여빈이란 이름을 처음 발견했다. 전여빈은 3막으로 구성된 이 영화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해서 신스틸러로 활약한다. 잠깐의 등장이지만 누가 옆에서 간지럼을 태우는 것처럼 실실거리며 활어처럼 펄떡이는 그의 코믹 연기에 푹 빠져버렸다. 새로운 배우를 발견한 문소리 감독의 안목은 탁월했다. 캐스팅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빨간 비트 주스를 마시며 전여빈이 말했다. “선배님과 대본 리딩하던 날, 주어진 대사를 읽었더니 ‘아니, 이렇게 대사가 잘 들리는 배우에게 그동안 왜 아무도 말을 안 시켜줬을까?’ 하는 거예요(웃음).” 다른 독립영화에서 줄곧 침묵으로 말하고, 묵언으로 연기한 그였다. 전여빈은 문소리에게 장난스럽게 이렇게 말했다고. “선배님, 저 그동안 말이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귀고리는 코스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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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배우를 꿈꾼 이래로 전여빈은 줄곧 무대 뒤편, 혹은 촬영장 카메라 너머 어딘가에 있었다. “연극을 하던 시기에는 조명이나 음향 오퍼레이터, 조연출 역할을 한 적도 있었어요. 극장 앞에서 티케팅을 담당하는 일도 했고요. 그러면서 무대 전체에 흐르는 호흡을 배운 것 같아요. 그 호흡은 배우끼리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작은 빛, 미세한 음향 소리 하나하나가 모두 모여서 앙상블을 이루거든요. 단역 배우 시절에는 정말로 대사 한 마디를 하고 싶어서 기다리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간절한지를 절실하게 배웠어요.” 문 감독의 영화 속 작은 배역을 맡았을 때 수화기 너머로 엄마와 통화하며 울 수밖에 없었다는 그 심정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터틀넥 톱, 반지는 모두 코스 제품. 귀고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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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라이브> 1회에서도 깜짝 출연한 전여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극 중 정유미의 친구로 등장해 함께 정장을 입고 허겁지겁 면접장에 뛰어가고,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위로 대신 캔맥주 한 캔을 건네는 사려 깊은 역할로 짧게 등장한다. 두 사람이 찜질방 옥상에서 떼창으로 목청껏 무반주로 노래 부르는 신은 명장면이다. “노희경 작가님의 드라마를 예전부터 정말 좋아했어요. <그들이 사는 세상>은 4~5번씩 돌려봐서 가족들이 그만 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웃음). 특별 출연이라 촬영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너무 기뻤고, 그 인물이 온전하게 되고 싶었죠. 작은 분량이었지만 제 나름대로 캐릭터를 재미있게 만들어보려고 했어요.” 촬영팀이 회식하던 날 노희경 작가가 전여빈의 이름을 재차 묻고 ‘잘한다’고 북돋아준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훈훈한 ‘성덕(성공한 덕후)’의 순간이다. 전여빈은 열심히 연기하며 시간을 잘 보내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좋은 기대감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한 채 노희경 작가를 향해 “감사합니다!”라고 씩씩하게 답했다.
전여빈은 자신을 대체로 밝은 사람, 어설프더라도 따뜻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온전히 빛난다’는 그 이름처럼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거쳐 마침내 비상할 채비를 마친 이 배우는 사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을 잔잔하게 누리며 산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만의 작은 식사를 만들어 먹어요. 닭가슴살을 데우고 아보카도와 무화과를 자르고 자신을 위해 요리하는 그 시간이 참 좋더라고요. 여유가 있을 때는 공원을 산책하고 하루 계획을 소박하게 세워서 진행해요. 보고 싶은 영화나 책이 있다면 공부하는 마음으로 찾아서 보죠.” 폴 토머스 앤더슨,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특히 좋아하고 최근엔 피나 바우슈의 영화 <피나 3 D>를 통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얼마 전에 아트 하우스 모모에서 이 영화를 재상영하길래 찾아가서 봤어요. 피나가 자신의 무용수를 가르치는 장면과 무용수들이 피나를 그리워하는 모습에서 감동과 자극을 받았어요. 요즘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 운동으로 기초 체력을 어느 정도 키우면 현대 무용을 배우겠다는 계획을 최근에 세웠어요.” 요가 수련이 가져다주는 평화로움을 잘 알고 있는 전여빈은 최근 처음 도전해본 실내 암벽 등반을 좋은 취미로 삼고 싶어 했다. 그의 취향과 관심사는 정말 다채롭다. 대학교 시절, 연기를 전공했지만 문예창작과, 무용과, 미술사학과, 실용음악과 심지어 회화과 수업도 수강한 적이 있다.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큰데 그걸 풀 곳이 없으니까 그 감정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너무 편안해지거든요. 노을이 지거나 아침 해가 뜨는 순간에 한강 다리 건너는 걸 좋아했어요. 그때 하늘의 색이 정말 예쁘고 다채로워서 캔버스에 그리곤 했죠.”

드레스는 로우 클래식, 귀고리는 코스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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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여우비가 내리던 어느 날, 홍대 벨로주에서 열린 밴드 모임 별의 공연에서 우연히 전여빈을 목격했다. 영화감독 남궁선의 초대로 갔었다고 했다. 2000년 결성된 이 밴드를 안다는 것, 그들이 2년 만에 선보인 공연에 와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전여빈은 촬영차 방문한 포틀랜드에서도 여우비가 오던 어느 날 차 안에서 들은 수프얀 스티븐스(Sufjan Stevens)의 ‘Death with Dignity’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올해가 시작되며 스스로에게 다짐한 무언가가 있는지 물었을 때 이런 답변이 되돌아왔다. “올해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는 못 했는데, 일상을 잘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하루의 시작과 끝에 제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말하다 보니 ‘보낸다’는 말은 조금 슬픈 것 같네요. 잘 걷겠다는 표현이 좋을 것 같아요. 누군가 궁금해하지 않더라고 그냥 내가 나의 이 작은 하루를 잘 걸어가고 싶어요.” 자유롭고 잔잔한 자신만의 호흡을 가진 배우 전여빈. 굽 낮은 신발을 신은 그가 뚜벅뚜벅 카페 테라스를 벗어났다.

피쳐 에디터
김아름
패션 에디터
백지연
포토그래퍼
홍장현
스타일리스트
박태일
헤어
이혜영
메이크업
오윤희 (제니하우스)
세트
최서윤 (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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