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져내리는 모래 세상 속에서도 자신만의 아름다움으로 단단한 지층을 쌓아가는, 박신혜의 시간.
〈W Korea〉해를 보내고 또 맞는 시기다. 당신의 지난 1년은 어땠나?
박신혜 나 자신에게 주는 휴식과 회복의 시간이었다. 드라마와 영화를 연이어 찍으면서 많이 소진된 상태여서 쉬어가는 한 해를 보냈다. 올해 미리 찍어둔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고, 아시아 팬미팅도 하고 샤넬 패션쇼에도 다녀오고 해서 쉬는 줄 몰랐다는 분도 계셨지만.
쉼 없이 스케줄을 이어가며 지쳤었나 보다.
촬영에 들어가 면 보통 3개월에서 5개월은 숨도 못 쉴 정도로 달려야 한다. 밤샘 작업이 많다 보니 체력을 최대치로 끌어내 쓰고 나면 건강이 걱정될 정도다. 쉬어야 할 때라 선언했지만, 막상 마음이 아주 편하지는 않더라. 뮤지션들이 무대에서 팬들의 환호를 듣다가 호텔에 돌아오면 허전하다는 얘기를 하는데, 나 역시 배우로서 현장의 치열함 속에 있다가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있을 때 비슷한 공허함을 느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기도 하고, 이러지 말고 일해야 하나 싶어 다시 대본도 받아 보고 그랬다.
어떤 방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했나?
여행을 가고, 조금씩 여유를 찾으며 운동도 배우고,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엄마와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고 부모님과 같이 골프도 쳤다. 사촌오빠가 살고 있는 양양에 가서 서핑도 배웠는데, 첫날 4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했다가 다음 날 온몸이 아파 후회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 같은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고, 더 오래 잘하기 위해 나를 새롭게 벼리는 준비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최근 개봉한 영화 <침묵>은 스릴러 장르에 무거운 이야기였다. 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땠나?
정지우 감독님은 길을 알려주기보다 질문을 던지셨다. 내게서도 계속 새로운 얼굴을 찾고 싶어 하셨고, 연출이 아주 세밀하고 치밀한 분인데 빈틈이 없는 작전 같은 현장에서 배우에게 힌트조차 주지 않으신다. 헷갈려 하고 물어봐도 답을 주지 않고 계속 새로운 느낌을 주문하셨다. 그걸 얘기해주는 순간 배우의 한계를 정해버리는 거 같다고. 그 순간은 답답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작품이 나오고 보니 고마운 일이었다.
류승룡, 오달수, 정진영 같은 남자 선배들과 연기를 많이 했다. 이번 최민식 배우와 일해본 건 어떤 경험이었는지 궁금하다.
현장을 아우르는 분위기가 강렬하면서도 다른 배우를 주눅 들게 하지 않는 분이셨다. 운동장같이 드넓은 놀이터를 만들어주셨달까. 말로 설명하지 않고 연기 자체로 보여주시니까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이 많을 텐데 칭찬으로 힘을 주시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다. 돌아보면 힘들었던 시기는 없나? 그때를 이기는 데 힘이 되어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다.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저 사람이 노력하고 있구나,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구나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다려준다면 감사한 일일 거다. 내 경우 크게 힘든 일은 없었지만 스무 살 무렵 대학 다니면서 1년 반 정도 일을 쉬었던 때가 생각난다. 그땐 소속 회사도 없이 매니저들하고만 일했는데, 주변 친구들이 주연 배우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걸 보면서 내가 학교 다닐 때가 아니라 작품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지금은 그때의 결정이 잘한 선택이라 생각하지만.
그때 쉰 이유는 뭘까?
평범하게 학생으로 지내고 싶었다. ‘아직 스무 살이니까, 내가 열심히 준비한다면 앞으로 기회는 많이 올 거야’ 하고 나 자신을 믿었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공부하고 선배들 연극 작품 준비도 돕고… 그런 경험이 지나고 보니 내 삶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올려주었더라. 그때 대학 친구들과 친해지지 못했다면 아주 외로웠을 거 같다. 배우의 삶을 살다가도 인간 박신혜로 돌아왔을 때 속할 곳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그런 시간을 보낸 덕분에 일에 더 몰입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기다리며 아끼고 응축해둔 에너지가 <미남이시네요>에서 터진 것 같다. 거의 처음으로 또래 친구들과 연기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근석 오빠, 용화, 홍기, 유이 언니… 그때 함께한 배그린, 최수윤 언니랑은 올여름 여행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
그 시기가 당신에게는 또 하나, 돌아올 공간이겠다. 아까는 학교 생활에 충실하면서 그런 추억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일하면서도 그런 자리를 잘 만든 셈이겠다.
지금 서로 너무 다른 환경에 놓여 있고 또 바쁘기도 하지만, 걱정 없던 스무 살 나이에 뭔가를 같이했다는 게 주는 유대감이 있다. 촬영장에서 너무 웃어서 엔지도 많이 내고 혼나기도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힘이 되는 순간이다. 촬영한 스태프들을 다른 현장에서 다시 만나기도 하는데, 그런 느낌도 좋다. 계속 앞으로 걸어가는데, 서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서 더 큰 뭔가를 굴리고 만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맞물리고 또 헤어지고…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된 세계가 촬영 현장이다. 가끔은 벅차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매일 설레는 경험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견뎌내고 감당하지, 하는 힘든 순간도 있지만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시기가 또 찾아오는 거 같다.
정신적으로 무척 건강하게 느껴진다.
건강하려고 노력한다. 이 직업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이면에 그렇지 못한 상황도 많지만, 안 좋은 건 빨리 잊고 좋아하는 걸 찾아다니려고 한다. 그러기에도 시간은 너무 부족하니까.
당신이 그렇게 찾아다닐 만큼 좋아하는 건 뭘까? 여행, 강아지, 고양이. 강아지는 엄마 집에 있고 지금은 고양이와 지낸다. 꼭 내 머리맡에서 같이 자는데 얘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자신의 어떤 점을 신뢰하나? 나를 믿기보다는 나와 함께하는 스태프들을 믿는 편이다. 그 믿음으로 뭔가 해냈을 때 강렬한 시너지가 났다. 나는 배우로서 자존감이 높은 편이 아니다. 열등감을 느끼는 부분도 있고 성격이 급하기도 하며, 불안도 많다. 그럴 때 내가 잘할 수 있게끔 환경을 구성해주는 분들이 주변에 있어 의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난 운이 좋은 사람이다. 매니지먼트 이사님과는 중 1 때 처음 만났고, 중간에 잠깐 떨어진 시기가 있었지만 10년 가까이 함께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왔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그 자리에 멈춰 힘들어하면 이사님은 여러 해결책을 들고 미리 앞으로 가서 진취적으로 더 나은 걸 찾아내주는 분이다.
그런 사람들을 오래 곁에 둘 수 있다는 것도 당신의 능력일 거다.
‘배우가 현장에서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우리의 몫이다’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분들이다. 늘 감사하다.
더 많은 화보 컷과 자세한 인터뷰는 더블유 1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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