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송혜교의 동시대적 로열 판타지. 그리고 그 환상 속에서 마주친 유아인과의 순간.
<W Korea> 지난번 인터뷰는 <태양의 후예> 드라마 종영 직후였는데, 7~8개월이 흐른 사이 그 드라마로 연기 대상을 받았다.
송혜교 2016년에는 한 해의 시작과 마무리를 모두 <태양의 후예>로 했던 것 같다. 보통 상반기에 방영된 드라마는 잊히게 마련인데 오래 기억해주셨다는 점에서 감사했고, 덕분에 연말을 축제 기분으로 보낼 수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새벽 2시쯤 감독님들, 송중기 씨와 김지원 씨 팀까지 다 같이 고깃집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새삼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상 자체의 의미보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서로 격려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는 면에서 고마운 수상이었다.
같은 드라마에서 연기한 남자 배우와 공동 대상 수상이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요즘 작품 캐스팅이나 제작 현실을 볼 때, 남자 배우의 활동이 여자 배우보다 더 돋보이는 건 아무래도 사실이지 않나? 다양하게 보여줄 기회가 많다 보니까 좋은 상 받을 일도 많을 테고. 여자 배우들은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도 보일 데가 없어서 안타까운 부분이 많다. 송중기 씨와는 서로 누가 받았어도 축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난 번 인터뷰 때 <태양의 후예> 강모연에 대해서, 남자 주인공에게만 끌려다니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면이 좋다고 했다. 픽션 여성 캐릭터 가운데 또 좋아하는 인물이 있나?
특정 인물의 어떤 면을 좋아한다기보다, 내 연기를 통해 그 인물의 상황과 매력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런 면에서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지만 그만큼 자연스럽기가 어려운 장르인 것 같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멈추게 만드는 옛날 영화들, 시즌마다 반복되지만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사라지지 않는 영화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이를테면 <귀여운 여인>이나 <노팅힐> 같은, 줄리아 로버츠의 로맨틱 코미디물은 단순히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고전이 되었다. 또 영화가 피상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울 수 있는 많은 부분은 배우의 힘에서 나온다. 그런 영화를 남기고 싶다는 꿈이 있다.
한국에서는 요즘 좀처럼 만나기 힘든 장르다. 반면 남자들이 여럿 나오는 범죄 스릴러 기획이 가장 활발한 것 같고.
점점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듯 영상에서 얻는 자극의 수위가 높아지다 보니 사람들이 웬만한 것에서는 재미를 못 느끼는 것 같다.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 서정적으로 흐르는 영화나 장면에서 유치하다고 반응하더라. 그럴 때 나는 답한다. “감수성이 메말라서 그런 거야.” 영화의 미덕을 점점 자기를 정신없도록 만드는 데서 찾는 듯해 안타깝다. 간이 세지 않아도 맛이 풍부한 음식처럼, 아름다운 배경 속에 감정의 결이 살아 있는 디테일 강한 영화가 더 많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나이 먹는다는 사실에 대한 생각도 하나? 앞으로 40대가 될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거나.
오히려 어릴 때 하지 못한 장르나 작품의 폭을 넓힐 수 있어서 배우로서 좋은 시기 같다. 외적인 부분에 대해 초조해하진 않지만, 내 몸이나 얼굴이 조금씩 변하는 걸 알아채기 때문에 긴장감은 느낀다. 타고난 체질이 방심하면 살이 찌는 터라, 요가를 일주일에 4일씩 해야 현상 유지되는 정도다. 워낙 게을렀는데 요즘은 약간 운동 중독의 길로 가는 거 같다. 얼굴에 생기는 주름을 두려워하기보다 연기할 때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런 면에서 전도연 선배가 정말 멋져 보인다.
여성 배우들과 같이 연기한다면 누구와 하고 싶은가?
여자들이 우르르 나오는 그림을 막연히 상상해본 적 있는데, 그 그림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은 전도연, 김혜수 선배님이다.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연기하는지 무척 궁금하고, 그분들 앞에 섰을 때 나의 시너지 같은 게 어떻게 나타날지도 궁금하다. 여자들이 액세서리처럼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 동료끼리 대등하게 뭔가 펼칠 수 있는 그런 시나리오를 보고 싶다. 할리우드에서는 여성판 <오션스 일레븐>도 기획된다는데, 한국에서 그런 게 나오면 얼마나 멋질까. 그리고 또래 배우인 전지현 씨, 손예진 씨와도 연기해보고 싶다. 나와는 아주 다른 색깔을 가진 분들이고, 나보다는 영화적으로도 탄탄한 길을 걸어왔으니까. 좀 더 어릴 때 그럴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20대 때는 여성 동료들과의 관계가 어땠나?
그때도 여자 배우들이랑 많이 친해지고 싶었고, 관심이 많았다. 송윤아, 최지우, 박솔미, 김희선… 언니들이 나를 많이 예뻐해주셨다. 20대 때는 여자끼리 서로 좋은 동료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기는 하다. 의도하지 않아도 경쟁 구도에 놓이거나 비교당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20대를 보내고 여러 경험을 하며 30대 중반에 들어서니까 그런 경쟁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지금은 배우 대 배우로 내 또래의 누군가를 만나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커지고 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동료로서 여자로서 궁금하다. 누군가의 좋은 부분을 인정하며 배울 준비도 되어 있고, 내가 채워주고 싶은 면도 보이고.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해묵은 통념 따위 믿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 설사 적이라 해도 서로 존중하면 된다. 나에게 오면 다행이지만 그 사람 것일 때는 보내주는 게 맞다. 어떻게든 쟁취하려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되더라.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정이 없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나에게는 남자인 친구가 없다. 그나마 최근에 같은 사무실 소속인 아인 씨, 드라마를 같이한 중기 씨와 친하지만 아마 그들에게는 밥을 잘 사주는 좋은 누나 아닐까?
일하면서 만나 뭔가 배운 여자 선배는 누가 있나?
노희경 선생님은 <그들이 사는 세상> 때 처음 만났는데, 당시 내가 호되게 혼난 것 같다. 말이 아니라 글로. 대본이 어려워서 숙제를 하듯 공부를 많이 한 작품이었고, 그로 인해서 많이 성숙해졌다. 연기에 대한 태도도 많이 바뀐 것 같다.
당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여성은?
아무래도 딸들에게는 엄마가 아닐까. 닮은 부분, 혹은 닮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부분에서 자신의 자아가 형성되니까. 우리 엄마는 외동딸인 나만 바라보며 무한한 사랑을 주신 분이다. 그 큰 사랑이 나를 모나지 않게 잘 자라게 해주었다. 귀가 시간이 몇 분만 늦어도 전전긍긍 걱정하시는 면이 어릴 때는 부담스러워서 동생이나 언니가 있었으면 했지만.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한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는 복에 겨운 아이였더라.
지금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나?
그런 것 같다. 힘든 상황이 벌어질 때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꺼이 달려와주는 든든한 친구들이 있으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잘하려고 하는데, 그런 마음을 돌려받으려 하지 않아도 배로 되어 돌아올 때가 있는 것 같다.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나?
주변 사람들이 정말 다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웃음).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다만 어릴 때는 쉽게 생각했는데,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으면서도 사람 보는 눈은 더 구체적이 되니까.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환상은 점점 없어지고.
사랑에 대해 낙관적인 편인가?
최선을 다한다는 면에서 낙관적인 것 같다. 만나는 동안은 그 사람에게 올인하고, 끝나면 뒤돌아보지 않는다. 만나는 동안 내 나름 잘했기 때문에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도 안 된 관계라면 정말 안 되는 거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연예인끼리 사귀다 헤어지는 데 대한 기사에는 꼭 ‘좋은 선후배로 남겠다’는 타이틀이 붙더라. 사실 남남으로 돌아가는 거 아닐까.
얼마나 쿨해야 좋은 선후배로 남는지 모르겠다. 사귀다 헤어지면 죽을 때까지 안 보는 거 아닌가. 서로 다음에 만날 사람에게도 그게 예의인 거 같다. 친구들과 그런 얘기를 한다. “그렇게 사랑하다가도 헤어지면 옆집 김씨만도 못하잖아. 옆집 김씨는 와서 못이라도 박아주지. ”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연기를 처음 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고 싶은가?
앞으로 벌어질 실수, 후회할 일을 미리 짚어주고 어떻게 살라고 코치해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얘기는 안 할거 같다. 다치고 상처받기도 하고, 아픔도 시련도 경험해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으니까. 딱 한 가지, 살 좀 빼라는 말은 꼭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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