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현의 눈과 얼굴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못할 말이 없는 오늘의 이도현과 드라마 <18 어게인>에서 교복 입고 나타나는 이도현은 전혀 다른 사람일 테니.
당신을 만나러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기사 제목이 이러했다. ‘JTBC 드라마 <18 어게인> 이도현, 신 심쿵우산남. 빗속 우산 티저 영상 공개.’
이도현 아이고….
화보 경험이 거의 없고 패션지도 잘 안 본다면서 능숙하게 촬영을 즐기더라. 스태프들이 계속 감탄을 하니까 ‘그렇게 안 띄워주셔도 된다’라고 말한 거 들었다. 내가 안 띄워주는 거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 우리 대화가 편하게 풀릴 것 같다. 빛을 쏘면서 촬영하니까 뭔가가 나를 한 꺼풀 씌워주는 것 같아서 안심되기도 했다. 사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앞에 있는 스태프들이 잘 보이지 않고 깜깜해서 선글라스를 낀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눈에 뵈는 게 없는 듯한 상태가 되니까 겁 없이 자유롭게 임했나 보다.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아이유와 얽히는 무인 고청명으로 등장했을 때와 오늘의 모습이 사뭇 다르다. 배우 데뷔한 지 3년이 채 안 됐으니 오디션을 많이 볼 텐데, 작가나 감독에게 들은 말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 웃는 모습이 매력 있다는 말을 들은 게 생각난다. 원래 자신 있게 웃지를 못했는데 그 말 듣고 나서 용기를 가 졌다. <호텔 델루나>를 찍을 때는 무기처럼 쓰려고도 했고. 마침 그 모습을 사랑해주는 분이 많아서 힘을 얻었다.
안 그래도 ‘청명이 역에 이도현 캐스팅하신 분 월급 올리세요 당장’이라는 댓글에 ‘좋아요’ 숫자가 높은 걸 봤다. 오늘 촬영 때는 거의 웃지 않았지만, <더블유>가 발행될 즈음이면 당신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18 어게인>이 첫 방송을 시작한 직후다. 어떤 드라마인가? 김하늘, 윤상현 선배님과 출연한다. 현실에 치인 서른여덟 살 가장이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열여덟 살 때 모습으로 바뀐다. 윤상현 선배님의 열여덟 살 버전이 나다. 사람의 속은 서른여덟 상태 그대로인데 외양만 10대로 돌아간 거다.
하루아침에 남편이 20년 회춘하면 아내의 입장은 어떨까 잠시 상상해봤다. 아, 열여덟 살이 된 그 모습으로 가족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다. 극 중에서는 남편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설정이다. 대신 자기 자식들과 친구가 되면서 아이들의 평소 속마음도 알아간다. 아내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지만, 자기 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해주려 애쓴다.
김하늘, 윤상현과 예능 <아는 형님>에 나와 학창 시절 농구를 했다고 밝혔다. 그냥 취미 수준이 아니라 꽤 한 것 같은데? 학교 다닐 때는 조용히 지내면서 주로 운동만 했다. 포인트 가드였다.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았다면 아마 운동을 계속했을 거다.
아버지는 왜 반대하셨나? 아버지가 젊을 때 야구 선수 로 활동하셔서 나도 어릴 적부터 함께 운동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운동을 해본 분이라 그 길이 얼마나 힘든 지 아니까 반대하신 듯하다.
운동을 접고 나서 어렴풋이 연예인을 꿈꾸게 됐나? 확고한 생각을 가진 건 아니다. 그저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할 때 공부하고 쉬기도 할 수 있는, 일반 가정집인데 기숙사 비슷한 공간이 있었다. 어머니가 이제 공부 좀 하라고 그런 곳에 보내셨다. 영어사전 겸 공부 할 때 활용하라고 전자수첩도 사주셨는데, 나는 그것으로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곤 했다. 영화 <해바라기>를 보고 또 보고….
<해바라기>, 그것은 대체 뭘까? 배우 지망생부터 이미 활동 중인 배우까지 그 영화와 김래원의 연기에 대해 언급하는 남자들이 참 많다. 어우, 잊을 수가 없는 영화지. 아무튼 그렇게 영화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기에 관심이 갔다. 아버지가 또 반대하셨다(웃음). 10대 때 한 번쯤 꿈꿔볼 수 있는, 그냥 일시적인 생각일 거라고. 어머니를 설득해서 고2 후반 무렵부터 연기 학원에 다녔고, 입시철이 되어서야 아버지께 사실을 털어놨다.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라기엔 그 결과가 ‘중앙대 연극학과 입학’이다. 어릴 때부터 끼를 감지하고 발산하는 또래들이 연기 학원에 많았을 텐데 거기서 주눅 들진 않았나? 주눅 든 게 아니라 자만을 했다. ‘나는 잘생겼고 연기도 잘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대입 시험을 보러 다녔는데, 모조리 다 불합격한 거다. 수시, 정시, 1차 합격, 뭐 하나 된 게 없었다. 재수 준비하면서 바로 정신 차렸다. 그때부터 조금씩 겸손해지는 법을 배운 것 같다.
태어나 살다가 인생에서 겪는 첫 번째 큰 좌절과 시련이 입시라더니, 그 옛말이 또 이렇게 증명된다. 그 이후 연기를 대하는 것도, 사는 태도도 바뀌었다. 인생의 모토는 무조건 ‘열심히’다. 뭐든 나에게 주어진 건 열심히 하 려고 한다.
원래는 목소리 톤이 지금 같지 않았는데, 발성법 훈련으로 중저음 목소리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내가 자만했다는 걸 깨닫고 나를 고치기 위한 훈련을 하다가 목소리부터 달라지는 효과가 나기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꾸준히 했더니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놀랄 정도였다. 목소리를 바꾸려 한 게 아니라 올바른 발성을 위한 훈련이었는데 목소리 자체가 좀 달라졌다.
어떤 훈련인지 보통 사람도 알아듣게 설명해줄 수 있나? 어느 정도 울림이 있는 목소리를 내려면 공명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소리를 입 앞쪽으로 모아서 그 소리가 앞으로 쭉 뻗어나가게끔 해야 한다. ‘즘’이라는 발음을 길게 오래 내고 있으면 입 앞쪽이 간질거리면서 울리는데, 그게 공명이 생기고 있다는 뜻이다. ‘즘’에서 ‘즘오아’ 식으로 발음을 천천히 바꾸며 입 모양을 변화시키면 이번엔 코 쪽이 간질 거린다. 이걸 수없이 반복하고 익숙하게 해놓으면 공명을 유지한 상태로 소리를 뱉을 수 있다.
좋아하는 연기는 어떤 스타일인가? 즐겁고 유쾌한 것 좋아한다. 그런 연기를 할 때 나도 재밌고, 멋진 남성을 연기해야 하는 건 아직까지 어렵다. 민망하다기보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 의심이 들어서다. 이병헌 선배님은 연기도 훌륭하고 워낙 위트 있는 사람 같다. 그런 여유를 언젠가 갖고 싶다.
올 연말에 공개되는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은 유쾌함과 거리가 멀지만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의 이응복 감독 차기작이라 기대가 크다. 원작은 마침 내가 좋아하는 웹툰이었다. 미스터리한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괴물들이 태어나는데, 좀비 같은 괴물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따라 만들어지는 괴물이다. 근육질의 몸을 욕망하던 사람은 프로틴 괴물로, 뭔가를 보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은 눈알 괴물로 변하는 식이라서 괴물들 생김새부터 특이하다. 나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 안에서 탈출하려는 무리의 냉소적인 리더 이은혁 역할이다.
그 작품을 하면서 당신의 평소 상태도 좀 달라지는 경험을 했나? 나는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6개월의 촬영 기간 중 막바지에는 내가 좀 예민해져 있더라. 우선 촬영장 자체가 늘 어두웠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안팎으로 싸움을 해야 하는 캐릭터여서 아무래도 영향을 받았다.
학부 때부터 연극으로 연기 경험을 꽤 했겠지만 데뷔한 배우로서는 신인이다. 연기해보니 어떤가? 할 만한가? 할수록 더 어렵다. 이응복 감독님께 힘들고 어렵다고 토로한 적이 있는데, 딱 한마디 하시더라. ‘안 힘들면 재미없지 않아?’ 아,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재밌다고 시작한 일인데 왜 자꾸 어렵다고 생각했을까?
어디까지 도달하고 싶다는 포부가 있나? ‘로코 장인’이 라는 말을 듣고 싶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로맨틱 코미디 물에 계속 욕심이 날 듯하고, 군대 다녀오고 30대 이후 부터는 ‘섹시한 남자 배우’로 불리고 싶다.
‘로코’에 욕심 있다는 걸 연애 좀 해봤다는 말과 비슷하 다고 느끼면 비약일까? 다양한 연애를 해보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같은 모양의 연애만 해본 것 같다. 늘 내가 먼저 좋아해서 다가가고, 대시하고, 그렇게 연애가 시작됐다. 한 번도 대시를 받아본 적이 없다.
당신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연인과 헤어지는 연기를 하기 위해 정말 이별을 고한 적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 응? 아… 대학교 초년생 때 이야기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주의다. ‘헤어지지 않으면, 그 감정을 모르면 이 연기를 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
그랬더니, 연기에 도움 되던가? 망했지. 첫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 연극인데 내 입장에서는 망했다. 연극 내용 중 내가 이별 후 술을 마시며 대사하는 장면이 있었다. 아무 리 고민해도 표현하기가 어려운 거다. 결국 진짜 소주를 소품으로 가져다 놓고 연기했다, 스태프나 다른 배우들 몰래. 대본 상 ‘병째로 들이마신다’는 설정이었다. 문제는 내가 술을 못 마신다는 것….
무대 위에서 대참사가 벌어졌나? 그 다음 장면 설정이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여자친구의 장례식장’이었다. 배우가 장례식장에 맞는 의상으로 갈아입고 무대에 다시 나 타났는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거지. 정신없이 이렇게 저렇게 마치고 나서 무대 뒤로 들어갔더니 스태프가 진짜 술 마신 거냐며, 깜짝 놀라 다그쳤다. 나는 술에 취해 바로 들어가서 잤고. 어린 시절의 실험 정신이었다.
과거의 그 여친에게 사죄하는 영상 편지는 못 띄워도, 지면 편지를 짧게 띄울 기회를 주겠다. 그때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미안하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그 정도로 연기를 잘하고 싶었다.
이번 드라마가 흥행하고, 당신의 연기와 매력이 나날이 알려지고, 스타가 되어 돈도 많이 벌면 뭘 하고 싶은가? 일단 우리 집 빚부터 갚을 거다. 빚을 갚고 부모님 께 꾸준히 용돈 드릴 여유도 생기면 이제 일을 쉬시게 하고 싶다. 어머니가 옛날부터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셨다. 얼마 전에는 용돈을 좀 드렸더니 빚 갚는 데 썼다고 한다. 속상했다. 앞으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용돈은 그냥 용돈으로 쓰셨으면 좋겠다. 그래야 마음 편히 연기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데뷔한 지 20년 된 스타도 아직까지 속상해하더라. 부모님께 용돈을 드려도 그걸 잘 쓰시지 못한다고. 장애가 있는 동생이 있다고 들었다. 어릴 때부터 동생 돌보는 시간도 많았겠다. 심하진 않지만 지적 장애가 조금 있는 동생이다. 어린 마음에 동생을 부끄러워한 적도 있었던 거 같은데,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날 동생이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 왔다. 나가서 동생을 괴롭힌 그 아이들을 혼내줬지. 그날 이후부터는 굳이 괴롭힘 문제가 아니어도 동생을 좀 더 챙기게 됐다. 최근에도 동생이 일하는 곳에 가서 음료 한 번 나눠드리고 인사했다. 그럼 내 동생한테 형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으니까.
그런 형이 있어서 동생은 참 든든하겠다. KBS 연기대상에서 단막극상 수상한 형, 아이유와 러브 라인 형성하는 역할도 한 형, 이젠 드라마 주연을 맡은 형이니까. 그런데 이젠 동생이 ‘이 사람 우리 형이야’ 식으로 너무 뿌듯해하는 나머지 좀 자만하는 기미가 보이더라. 불러놓고 한마디 했다. 어떤 경우에도 자만하면 안 된다.
입시에 실패하며 태도가 바뀌고, 웃는 모습에 자신 없 었다가 감독님의 한마디에 용기를 내고, 동생이 괴롭힘을 당한 이후부터 쭉 동생을 챙기게 된 이도현은 계기가 중요한 인간 같다. 그런데 자만심을 경계하는 그 마음이 어느 순간 스타가 된 계기로 변하면 어떡하나? 나는 정신 붙잡고 살 거다. 내가 변한 것 같으면 내 따귀를 때려달라고 주변에 이미 말해뒀다.
지면에 실리지 않은 B컷 공개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포토그래퍼
- 김선혜
- 스타일리스트
- 정혜진, 김선영(MSG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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