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추구하는 음악의 뿌리에 힙합은 없지만, 모쿄는 힙합의 둘레에서 음악을 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온전히 자기 자신을 꺼내놓는 음악을 들려주려 한다.
‘모쿄’라는 이름의 뜻이 뭐냐는 질문을 아흔아홉 번쯤은 받아봤을 듯하다. 이름의 의미가 뭐라고, 당신이 누구인지가 더 중요하지. 모쿄는 누구인가?
모쿄 나는 음악 만들고 노래하는 사람이다. 작년까지 얼마간은 프로듀서를 했지만, 이젠 내 음악을 하고 싶어서 개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인가? 누군가의 레퍼런스가 되고 싶고, 동시에 아무도 따라 부를 수 없는 노래를 하고 싶다.
나이는 어떻게 되나? 91년생이다.
언제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나? 업으로 삼은 지는 5~6년 됐다. 예전에 3인조 인디 밴드 활동을 잠시 했다. 나는 보컬과 신스를 맡았다. 요즘에 밴드가 많이 사라지고 거리 문화도 죽은 상태인데, 내가 밴드 생활을 할 때도 환경이 열악한 건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 힘드니까 오래 못하고 접었다.
유튜브에 검색하면 그 시절 당신의 음악 스타일이 드러나겠지? 자료가 없다. 밴드 해체 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내서, 그때 음악과 관련된 데이터를 지웠다. 음악을 관둘 생각이었다. 타투 일을 하면서 음악과 좀 떨어진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 모쿄의 이름이 자주 오르는 분야는 힙합 언저리다. 몇 년 전 우연히 로꼬 형을 알게 됐고, 곡 작업을 했다. 힙합을 만드는 과정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이뤄지고, 그 프로그래밍 안에서 가능한 음악 구조를 보니 힙합 음악을 만드는 일이 쉬워 보였다. 자만이 아니라 그 장르에 접근하는 일이 해볼 만했다는 거다. 원래 내 음악의 뿌리에 힙합은 없다. 힙합은 내 능력 안에서 좋은 음악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 주는 일, 다시 말해 비즈니스의 하나지 정말 큰 기쁨을 안겨주는 일은 아니었다.
어렵지 않아 보여서 뛰어들어봤더니, 정말 그렇던가? 그렇다. 막상 해보니 재미도 있고, 수익도 있었다. 하이어뮤직에서 프로듀서로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pH–1 형의 앨범 만드는 데 쏟았다. 그 형의 음악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싶었다.
내가 아는 어느 힙합 필진은 당신이 천생 프로듀서인 줄 알았다던데? 그만큼 당신이 해내야 할 일은 잘했다는 뜻 같다. 밴드 생활을 할 때부터 힙합 쪽 뮤지션이 나에게 연락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힙합 레이블 투어 공연에서 우리 밴드가 게스트로 무대에 선 적도 있고. 내가 특이한 음악을 한다고 관심 가져주는 이들이 생기면서 인맥이 조금씩 넓어졌다. 그러나 나는 애초부터 퍼포머이고 싶었지, 조력자이고 싶진 않았다.
밴드에서도 보컬이라는 프런트맨으로 무대 맨 앞에 섰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음악 프로듀서의 존재를, 그렇게 조력자의 위치라고 말할 수 있나? 최종 결과물이 드러나는 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작업 과정에서는 그 둘의 역할을 확실히 나눌 수 있다. 프로듀서는 사운드 하나를 만들 때도 여러 디테일에 다 관여해야 하는 거다. 이제는 내가 집중하는 부분이 좀 다르다. 내 앨범을 위한 셀프 프로듀싱을 어느 정도는 하겠지만 다른 프로듀싱 팀을 꾸리고 있다. 가사 쓰기, 뮤직비디오나 나를 표현할 전반적인 분위기 등에 더 집중한다.
8월, ‘유윌노우’에서 당신을 영입했다는 소식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딘(Dean)이 차린 회사다. 내 음악에 몰두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이어뮤직과 논의 끝에 계약을 해지했고, 딘은 내 음악을 접한 뒤 음악이 너무 좋다며 연락을 해왔다. 유윌노우와 정식으로 함께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나는 레이블이 이름을 알린 아티스트 하나를 중심으로 몸집을 키워가는 경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딘과 무리들’ 식으로 비치는 건 원치 않았다. ‘나는 너에게 속한 아티스트가 아니라 서로 같이 음악 하는 동료이자 서로의 조력자가 됐으면 한다’는 뜻을 딘에게 확실히 전달했고, 딘도 그런 내 생각을 멋있게 받아들여 줬다. 내가 속한 회사를 만든 사람이 딘일 뿐이다.
당신의 영입 소식과 함께 유윌노우의 여러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싱글 ‘숨’이 공개됐다. 유윌노우 컴필레이션 앨범에 실릴 곡인데, 그럼 우리는 모쿄라는 개인의 앨범보다 유윌노우의 색이 드러날 앨범을 먼저 만나게 되는 셈인가? 그건 아니다. 컴필레이션 앨범은 제작 과정 단계에 있는지라 언제 완료될지 나도 알 수 없고, 내 앨범이 어떤 형태로든 먼저 나올 거다.
어떤 음악을 준비 중인지 알려줄 수 있나? 내 색깔이 완전히 묻어날 것이다. 추구하는 가사는 무신경한, 무심한 태도 같은 거. ‘아, 몰라’, ‘내 앞에서 방해할 거면 꺼져’에 가깝다. 팝 요소 를 접목해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만드는 음악, 최대한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성격이 될 것이다.
우선 모쿄라는 음악가의 세계를 추측해볼 단서는 작년에 발 표한 두 싱글, ‘Something’과 ‘Daddy’다. 가사를 모두 영어로 썼다. 해외 시장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렇다. 외국에서 살아 본 적은 없고, 혼자서 영어를 공부했다.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에 관한 노래다. 퍼포머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것인가? 사실상 신호탄은 유윌노우에서 나올 음악이 될 것이다. ‘Something’은 내게 개념 음악 같은 거다. 내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음악을 하든, ‘나의 첫 노래는 무조건 엄마에 관한 노래’라는 규칙이 있었다. 대중에게 들려주기 위한 노래라기보다 내 정신이 깃든 노래를 플랫폼에 존재하게 만드는 행위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내가 스물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담은 곡이 세상에 나오면, 어머니가 어디서든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Daddy’의 느낌이 조금 더 좋았다. 우울함을 자아내는 게 아니라, 눌러 담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감정이 있는 듯했다. 해외 팬들도 그 곡을 더 좋아했다. ‘Daddy’는 아빠에 대한 미움을 담은 공격적인 곡이다. 가사와 사운드는 모두 공격적이되, 그 안에서 악기 면으로는 부드러움을 넣어 역설적으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뭔가? 내가 살면서 겪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특이한 분이셨다. 정신과 태도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고, 물질적인 것은 무의미하게 봤다. 종교는 없었다. 다만 잠들기 전 정신을 맑게 하는 명상을 함께 자주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다.
어떤 방식으로 명상을 했나? 어머니와 먼저 대화한 후 내 방에 들어가서 혼자 시간을 가지는 식이었다. 오늘의 부끄러움이 있는지, 있다면 그건 정신에 위배 되지 않는 선에서의 부끄러움이었는지 되새김질하면서 정신과 태도를 확립하라는 뜻이다.
어머니가 늘 강조한 말들은 예를 들면 어떤 문장이었나? ‘정신은 영원하다. 정신은 죽어도 남고, 육체는 짐이다. 육체 안에서 정신이 흔들리면 나약한 것이다. 육체가 정신을 따르게 해야 한다. 그 정신이 건강하려면 몸이 건강해야 한다. 정신과 삶의 태도가 일치해야지 모순되면 안 된다.’ 나는 어머니의 수준을 따라 가지 못했다. 요즘도 명상을 하며 가르침을 떠올려보면 반성할 일이 많아서 죄송하다.
혹시 편찮으셔서 돌아가셨나? 그렇다. 고등학생 때부터 스물두 살이 될 때까 지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내 삶이 따로 없었다.
그런 어머니와 보낸 삶에서 음악을 하는 데 영향을 끼친 시간이 있었나? 내 모든 행위의 영감의 원천은 그냥 다 어머니다. 음악이나 영화 같은 게 아니다. 음악을 할 때 딱히 레퍼런스라고 할 만 한 것도 내겐 없다.
그래도 좋아하는 뮤지션은 있지 않나? 물론 많다. 그중 단 한 사람을 꼽자면 포크 뮤지션 닉 드레이크다. 감정적인 면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줬다. 지향하는 음악이 비슷한 것도 아니지만, 그의 음악은 수천 번 들어도 넋이 나가곤 한다. 또 하나는 브라이언 이노.
왜 음악을 하나? 음악은 여러 가지를 해본 끝에 만난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어릴 때부터 배웠고, 영어 공부도 많이 했다. 자격증을 12개인가 땄다. 나 공부를 꽤 잘했다. 그러다 그림에 관심이 생기고 빠져들었는데, 입시미술이라는 시스템을 겪고서 크게 실망하고 바로 접었다. 그때 어머니는 또 이런 말을 하셨다. ‘돈을 못 벌고 직업이 없어도 상관없다. 진정 하고 싶은 뭔가를 하기 위해 도달하는 과정에서 지치지 말고 성 실하게 임하는 태도만 가져라. 그러면 성공한 인생은 아닐지언정 충분히 행복한 인생일 수 있다.’
어머니가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고 가셨다. 뭘 하면 좋을지 이것저것 찾아다녔다. 컴퓨터를 다뤘으니 중학생 때부터 음악 비슷한 소리를 만든 적은 있는데, 악기는 스무 살 넘어서 배워 봤다. 정말 재밌더라. 어릴 때도 내가 좋아하는 소리가 실험 음악 쪽이어서 공간 연출적인 소리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했다. 그저 취미였는데, 악기를 배우면서 그 둘이 하나로 합쳐졌다. ‘아, 이걸 가지고 재미나게 해볼 수 있겠다’ 싶었고, 그렇게 밴드 생활로 이어졌다.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고 느끼나? 그렇다. 나는 아주 단단하다.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너만큼 단단한 사람 못 봤다’는 거다.
뮤지션 모쿄는 이제 제대로 시작하는 것 같다. 시작과 끝은 맞물린다. 당신의 정신인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혹시 기억하나? ‘물리적인 육체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정신은 영원해. 정신은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슬픔은 육체의 나약함일 뿐이니까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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