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사냥
엷은 미광이 깔리는 여름, 침대맡에서 기기묘묘한 장르문학을 한참이나 즐기다 잠을 청하는 숱한 밤들. 장르 문학 소설가 네 명이 취향과 편애로 고른 베드타임 스토리 12개를 보내왔다.
Mistery
<로재나> (엘릭시르), 마이 셰발, 페르 발뢰 지음
헨닝 망켈의 ‘형사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도, 스티그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도, 이 시리즈가 아니었다면 출현이 훨씬 늦었을 것이다. 기자 출신 커플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1965년 부터 1975년까지 써내려간 ‘마르틴 베크’ 10부 작은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경찰을 주인공으로 한 선구자격인 작품이자, 강력한 사회 비판 의식으로 유명한 북유럽 미스터리의 원점이기도 하다. 시리즈 1권 <로재나>는 호수 밑바닥에서 발 견된 여성의 시체로 시작한다. 여성의 신원은 수수께끼였다. 근방의 실종자 명단에서도 인상착의가 맞는 이가 없었다. 형사 마르틴 베크는 끈기 있게, 실망하지 않고 희미한 단서들을 하나씩 추적해간다. 피해자가 누군지 알지 못하면 살인범이 누군지도 알 수 없다. 소설 내내 대부분 속 쓰림과 수면부족에 시달리면서도 ‘그녀가 누구 이고 어디에서 왔든, 내가 반드시 찾아내겠어’라고 몸을 곧추세우는 이 평범하고 신중한 형사의 느린 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복지국가’ 타이틀로 유명한 스웨덴 내부의 빈곤과 인종차별과 여성혐오가 어떻게 은밀하게 작동하며 주위를 타락시켰는지를 목도하게 된다. 즐거운 지적 유희 참가자로서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목격자의 위치에 독자를 앉혀두는, 현대 범죄소설의 고전이자 훌륭한 ‘시작’으로서의 작품이다.
<13.67> (한스미디어), 찬호께이 지음
책의 제목은 2013년과 1967년을 뜻한다. 2013년부터 시작하여 2003년, 1997년, 1989년, 1977년,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여섯 건의 범죄가 펼쳐지고, 홍콩 경찰총부의 전설적인 인물 관전둬의 삶이 그 범죄들과 함께 진행된다. 각 단편이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듯싶다가 이 모든 조각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연결된다는 걸 깨달을 때쯤, 결국 <13.67>은 홍콩이라는 유례없이 독특한 시공간에 관한 기록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홍콩은 1898년 7월 1일부터 1997년 6월 30일까지 영국 정부의 지배를 받았고, 그 사이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는 일본에 점령당했으며, 1997년 중국으로의 반환 이후 ‘1국가 2체제’라는 기묘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찬호께이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도시에서 성장하면 정체성에 대해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홍콩인’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백 년 넘도록 여러 국가 간의 긴장 관계를 버텨내며 홍콩은 무엇을 상실했는가. 거기서 벌어진 갈등과 투쟁과 폭력이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비통함과 실망과 희망이 뒤섞인 페이소스가 소설 전체를 휘감는 동시에, 범죄의 단죄에 관한 균형 잡힌 시선과 정교한 트릭 풀이가 독자의 영혼을 사로잡 는다. 21세기 아시아 미스터리의 걸작을 꼽는다면 <13.67>을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아작) P.D. 제임스 지음
22세의 코델리아 그레이의 삶은 신산하다. 부모를 모두 여의었고, 위탁가정과 기숙학교에서 십대 시절을 보냈다. 사설 탐정으로서 막 걸음을 뗀 코델리아는 어떤 청년의 자살을 둘러싼 의문을 풀어달라는 첫 번째 사건을 맡는다. ‘악이 존재했다. 악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수녀원에서 받은 교육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악은 바로 이 방에 존재했다. 여기 사악함이나 무자비함, 잔인함, 탐욕보다 더 강력한 뭔가가 있었다. 악.’ ‘코 델리아는 당신처럼 젊고 예쁜 여자가 탐정이라니요, 정말 어울리지 않네요’라는 무례한 호기심과 무자비한 경멸의 시선. 노동계급에 속한,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물리적, 정신적 유산이 없는, 일을 잘해내겠다는 열의와 성실성밖에 없는 코델리아 그레이는 ‘남성’ 탐정이 겪을 일이 없는 종류의 시선을 이겨내며 묵묵히 나아간다. <여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P.D. 제임스가 1972년에 쓴 책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새러 패러츠키의 ‘V.I. 워쇼스키’와 수 그래프턴의 ‘킨지 밀혼’이 그 후계자로 등장했다. 독서 대중에게 하드보일드한 ‘직업인’으로서의 여성 탐정이 가시화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글│김용언 영화지 <키노>, <필름2.0>, <씨네21>과 장르문학 잡지 <판타스틱>의 기자 겸 에디터를 거쳐 현재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범죄소설> 등이 있다.
Fantasy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 (황금가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지음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는 20세기 초 활동한 미국 작가다. 그는 진흙처럼 으깬 시체들로 거인을 빚고, 목이 잘린 시체가 터벅터벅 복도를 가로지르며, 구울들이 음습한 눈을 빛내며 시체를 갉아먹는 종류의 소설을 쓴다. 시체가 그에게 당최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생전 그의 작품은 주로 두 가지 이유로 출판사, 잡지사 등에서 반려되었다고 전해진다. 첫째, 묘사가 너무 잔혹해서. 둘째, 독자들이 그의 화려하고 시적인 글을 쉽게 소화하지 못해서. 어딘가 묘하게 서로 맞물리지 않는 사유들이지 않나? 작가는 과거 어느 서신에 남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화려한 표현을 쓰는 것은 결코 단어 자체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장면의 미묘한 어감을 드러 내기 위한 것이라는 항변을 남겼다. 또 다른 서신에선 그것을 ‘기계화된 상상력에 저항하는 행위’라고도 말했다.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의 후반부에 실린 단편 <마법사의 귀환>은 1972년 영상화되기도 했는데, 당시 이를 통해 얻은 수익은 그가 평생 쓴 모든 작품의 료를 상회했다고 전해진다. 즉, 생전 그가 어떤 ‘성공’을 맛봤을 가능성은 적을 것이란 말이다. 대중성과는 담을 쌓은 채 고수해온 그만의 문필은 <클라스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에서 전천후로 맛볼 수 있다. 당시 독자들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귀기 어린 문장이 이끄는 온갖 잔혹한 희생 제의와 그를 집도하는 흑마술사들의 세상이란 과연 어떤 곳인지, 책을 덮을 즈음 슬며시 궁금해질 것이다.
<멋진 징조들> (시공사), 닐 게이먼, 테리 프래쳇 지음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는 ‘나쁜 사람’을 찾는 것을 좋아한다. 무슨 문제든 뚜렷한 계기가 있고 그것을 따라가면 일의 모든 악성이 궁극적으로 응축된 병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병소가 왜 병소가 되었는지, 병소와 사건을 곧장 잇는 선만 ‘찍’ 그으면 정말 모든 인과가 설명되는 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그건 병소야’, ‘병소는 원래 그래’라고 인정하는 편이 어쨌든 똑 떨어지긴 하지만. 그런데 <멋진 징조들>은 그 반대다. ‘원래’라는 논리가 없다. 성경 속 전형적이기 이를 데 없는 인물들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려낸다. 가령 악마는 피비린내 나는 인류의 역사를 보고 어떻게 저것보다 잘할 수 있겠느냐며 실의에 빠진다. 농업혁명 이후 퇴치된 줄 알았던 굶주림의 기수는 다이어트 식품을 파는 CEO로 크게 성공한다. <멋진 징조들>은 고정된 배경에서 고정적으로만 쓰이던 인물들로 이뤄낸 역발상의 쾌거인 셈이다. 나아가 책은 기존의 질서를 비틀기만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덮어놓고 당연한 것, 원래부터 어떤 무언가가 없다는 것은 결국 어느 무엇이든 된다는 것, 그 가능성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라고 넌지시 건네는 다독임이 책 안에 있다. 실제로 작중 가장 큰 시련을 해결하는 것이 결국 선도 악도 아닌 인간의 어중간한 마음씨이기도 하다.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 (우물이있는집), 야콥 슈프랭거, 하인리히 크라머 지음
판타지란 역사다, 라고 누군가 말했다. 역사라는 짐짓 무거운 말을 써서 와닿지 않을 뿐, 이런 식으로 표현을 바꾸면 대개가 수긍한다. 판타지란 맥락이다.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왠지 정말 이럴 것 같아!’ 싶게 서술할 때 맥락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는 500년 전 중세 유럽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간 마녀 사냥을 다룬다. 판타지 소설이지만 ‘판타지’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야기라기보다, 재판에서 피고를 다루는 절차를 규정한 실용 서적에 가깝다. 다만 그 재판은 마녀 재판이고, 절차가 ‘피고가 말을 못하게 되기 전 자백 받기’ 정도에 그친다는 것이 맹점이긴 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이 책을 보며 굳게 믿고 말 것이다. 자신이 진짜 마녀를 단죄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야말로, 조금 으스스하지만, 이 책의 맥락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지 않을까?
글 | 이신주 1996년생, 현재 뜨겁게 떠오르고 있는 신예 장르 문학 소설가다. 작년 다중인격이 절대 다수이고 단일인격이 극소수인 세계관을 그린 단편 <한 번 태어나는 사람들>로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거머쥐었다.
HORROR
<단편들, 한국 공포문학의 밤> (황금가지), 배명은 외 9인 지음
사람들이 호러 소설을 즐기며 가장 큰 공포를 느낄 때는 언제이던가. 귀신이나 끔찍한 형상의 괴물이 등장할 때? 잔혹한 살인사건이 벌어졌을 때? 물론 앞의 두 순간 역시 충분히 공포스럽다. 하지만 단순히 ‘무서운 이야기’로 인지했던 소설 속 현실이 곧 나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진정한 공포 체험에 가깝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런 것들 말이다. 독박육아, 주거 난민, 왕따, 가정폭력…. <단편들, 한국 공포문학 의 밤>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요소들은 결코 우리와 멀리 있지 않다. 이 책은 호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입문 가이드’, 이미 즐기는 사람 들게는 ‘종합 선물 세트’라고 소개할 수 있겠다. 10명의 작가가 각기 다른 10개의 이야기를 아주 낯설게 풀어놓는데, 각각의 이야기는 기존의 ‘무서운 이야기’가 공포의 대상을 다루는 방식을 가볍게 벗어나기도 하도, 정직하게 호러의 공식에 충실하기도 하며, 여느 사회파 소설보다도 진득하게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물론, 그 끝에 있는 것은 잠들기 전 전등을 켜게 만드는 섬찟함이지만.
<보기왕이 온다> (아르테), 사와무라 이치 지음
<보기왕이 온다>는 1994년 시작한 일본 호러소설대상 역사상 최초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예선을 통과한 작품이다. 별다른 수식어 없이 압도적인 느낌을 전하는 제목처럼 소설 속 보기왕은, 아주 가차 없다. 어느 정도냐고? ‘설마 죽이겠어?’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 그러니까 ‘설마 죽…’이라는 예감이 스칠 무렵, 이미 사건은 벌어져 있다. 실체 없는 초월적 존재가 자비까지 없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 대상 앞에서 인간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무력함은 곧 공포와 직결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결되지 않는 현실은 또 하나의 공포니까. 소설은 총 3장으로 나뉘고, 매 장마다 화자가 바뀐다. 앞선 장에서 나온 사실들이 다음 장에서 미묘하게 비틀리고, 초반 다소 전형적으로 출발한 캐릭터들이 이야기가 전개 될수록 입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쫒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설은 출간 이후 곧장 나카시 마 테츠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배우 오카다 준이치가 주연한 영화 <온다>가 그것이다. 책을 읽고 구미가 당겼다면, 영화 보는 것도 추천한다. 나카시마 감독 특유의 화려한 영상미 와 사운드, 그리고 소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B급 감성이 제법 강렬하다.
<고시원 기담> (캐비닛), 전건우 지음
기구한 역사가 담긴 수상한 고시원에 괴물이 산다. 전형적인 호러의 배경과 틀을 가지고 있지만 뜻밖에도 <고시원 기담> 속 이야기는 따뜻하다. 작가가 고시원이라는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호러 소설가답지 않게(?) 따뜻하기 때문에. 작년 OCN에서 방영한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는 고시원에서 벌어지는 범죄와 그로 인해 ‘미쳐가 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다. <고시원 기담>과 <타인은 지옥이다> 모두 고시원을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하지만, 두 작품에 서린 온도는 판이하다. 고시원 특유의 과한 비좁음 탓인지, 아니면 한국의 과도한 집값 문제가 그 장소를 공포스럽게 만든 탓인지, 고시원은 언젠가부터 호러 장르의 단골로 등장하면서 K-호러의 아이콘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하지만 <고시원 기담>의 주된 시선은 공간 자체가 주는 두려움보다 그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에게로 향한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이다. 도시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시원 안에는 수많은 우리의 이웃이 살고 있으므로. 결국 이 작품은 호러의 탈은 쓴 채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나 다름없다. 작가는 여기에 판타지 한 숟갈, 무협 한 숟갈, SF 한 숟갈을 맛깔스럽게 버무렸다. 현실에서 소외된 이들이 뭉쳐 ‘절대악’과 세상에게 맞설 때, 그들을 응원하지 않을 이가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작중 귀엽고 멋진 고양이까지 등장한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글 | 조예은 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쓴 소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가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거머쥐며 본격 소설가로 데뷔했다.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에서 장편 소설 <찬의 전의>로 대상을 수상했으며, 올해 블랙 유머를 통해 가부장제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오컬트 좀비물 〈칵테일, 러브, 좀비〉를 출간했다.
SF
<인간의 피안> (은행나무), 하오징팡 지음
새로운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 킬까? 인간은 미래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SF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 세계에 사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장르다. 숱한 SF 소설가 중에서도 <접는 도시>로 휴고상을 수상한 중국 작가 하오징팡의 소설은 미래를 직접 목격한 사람의 관찰기처럼 유독 밀도 높고 날카롭다. 하오징팡에게 제16회 중국문학미디어상을 안겨 준 소설 <인간의 피안>은 인공지능이 일상화된 사회를 그리며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 정체성에 대해 탐색한다. 그의 소설에서 인공지능은 종종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그가 그리는 인공지능은 작중 인물의 시선에 갇혀 있지 않은 채 주체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자신을 만들어낸 인간을 마주하며 인간의 사고방식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한탄하기도 한다. 이러한 줄기는 우리 인간에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 인가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소설에 실린 총 6개의 단편은 가까운 현실에서 부터 과학기술이 발전한 미래까지 시간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자신 있게 추천하는 작품은 임종을 앞둔 어머니를 모신 병원의 비밀을 파헤쳐 나가는 <영생 병원>과 세살짜리 어린아이를 탐구하도록 명령받은 인공지능 ‘건곤’ 의 이야기를 담은 <건곤과 알렉>. 아마도,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래로의 여행을 선사할 것이다.
<킨> (비채), 옥타비아 버틀러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과거로 타임 슬립하게 된 주인공 다나의 여정을 그린다. 과거로 돌아가 비극적인 사건을 막거나 미래를 여행하는 타임 슬립은 SF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에게도 익숙한 장르에 해당하지만, <킨> 이 유독 특별한 이유는 주인공 다나가 ‘흑인 여성’이라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다나는 20세기 미국에서 백인 남편과 신혼 집을 정리하다가 예고도 없이 19세기 미국 남부 메릴랜드주로 떨어진다. 그가 생존을 위해 백인 농장주에 복종하는 노예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소설은 젠더와 인종차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사뭇 진중하게 다룬다. 주인공이 타임 슬립할 때마다 시대가 원하 는 인간상에 부응해가는 과정, 그의 백인 남편이 과거로 타임 슬립해 겪는 상황을 목도하면 이 소설이 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는 타임 슬립 구조를 택했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소설이 그리는 주제와 페이지 수는 제법 묵직하다. 하지만 일단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면, 멈추지 않고 결말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빈티:오치제를 바른 소녀> (알마), 은네디 오코라포르
<빈티:오치제를 바른 소녀>는 힘바족의 가난한 흑인 소녀 빈티가 외계 종족 메두스와의 갈등을 중재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그가 피부와 머리카락에 바르는 ‘오치제’는 꽃 기름과 붉은 흙을 섞어 만든 점토로, 강렬한 태양에 맞서기 위한 힘바족의 보호제다.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빈티는 어느 날 수학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아 지구를 떠나 은하 최고의 대학 ‘움자 대학행성’에 입학할 자격을 얻는다. 지구를 떠나는 것을 반대하는 함바족 커뮤니티,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를 떠나 우주선을 탄 빈티는, 행성에 다다르기 전 외계 종족 메두스에게 습격을 당하고 만다. 미지의 존재와 맞닥뜨린 빈티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우주선에 탑승했을 때처럼, 포기를 모른 채 자신 있는 태도로 메두스의 습격에 대응한다. 그렇다. 우주를 구할 자격은 부유한 백인 어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빈티:오치제를 바른 소녀>는 총 3부작 중 1편에 해당하는 중편 소설 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작은 책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타나는 오프닝 그래픽은 주인공의 여정을 함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 | 박해울 작년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에서 <기파>로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향가 ‘찬기파랑가’와 SF를 접목한 작품 <기파>는 신라 시대 화랑으로 널리 알려진 ‘기파’가 해독자에 따라 의사로, 심지어 승려로도 해독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미스터리 SF로 ‘어느 하나 빠진 것 없는 균형의 결정체’라는 심사위원 평을 이끌어냈다.
- 피처 에디터
- 전여울
- 포토그래퍼
- 장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