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을 명 받은 윤두준과 집 안에서 빈둥거렸다. 군 생활이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그려지는 시간과 달라진 그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역한 다음 날 이렇게 <더블유>와 함께해줘서 고맙다. 소문 들은 팬들이 동서남북 어디를 향해 절하면 되느냐고 댓글 단다(웃음). 그런데 ‘미복귀 전역’이라는 걸 이미 지난달 중순에 했더라. 그런 건 처음 들어봤다. 요즘 상황이 심각하다 보니 처음 생긴 제도라고 들었다. 남은 휴가를 쓰고 나서 부대에 복귀하지 않고 전역할 수 있는 걸 말한다. 물론 전역 일까지는 어쨌든 군인 신분이다.
직장인 퇴사할 때랑 똑같네. 휴가 일수가 남았으면 퇴사일 전까지 다 소진해야 한다. 당신이 3주 하고도 며칠 전에 부대에서 나온 걸 생각하면, 그만큼 못 쓰고 남은 휴가 일수가 많았나 보다. 그렇다. 최근 군인들의 휴가가 많이 통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휴가로 외부에 나갔다 복귀하면 자체적으로 얼마간 격리 생활을 한다.
그럼 지난 3주간 속세를 접하며 슬슬 민간인 모드로 복귀했겠네? 아직 많이 어색하다. 스케줄로 치면 어제 브이앱 라이브 한 번 진행하고 바로 오늘 화보 촬영한 거거든.
육군 현역으로 복무한 곳이 12사단 헌병대인가? 응, 헌병대대. 이제는 군사경찰대대라고 명칭이 바뀌었다.
잘 모르는 세계이기도 하니까 잡다하게 궁금하다. 헌병은 일 반 군복과 다른 군복을 입나? 아니, 같다. 대외 활동을 나가는 특수한 보직의 용사는 사복을 입고 머리도 기르는 경우가 있지만. 헌병은 한마디로 군대의 경찰이다.
총 가지고 있는 군인들? 장총이던가? 권총이다. 하지만 나는 일반 헌병이어서 총은 소지하지 않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영장 받은 어린 남자가 군 입대 준비물 뭐 필요한지 질문 글 올리면 ‘K2 소총 준비하셨냐’ ‘수류탄은 꼭 챙겨 가야 한다’ ‘촉박하다면 직구 추천’ 식의 답글이 진지하게 죽 달리는 경우가 있지. 헌병도 지원해서 가는 것인가? 내 경우는 아니다. 나도 잘은 모르는데, 지원율에 따라 배치되기도 하는 거로 안다. 이걸 강제라고 하면 뉘앙스가 이상하고 ‘징집’이라고 한다.
내가 약 15년 전에 신문사의 대학생 명예기자 자격으로 최전방 부대에서 1박 2일 머물며 취재한 적이 있다. 토요일 아침에 소위 ‘군데리아’라고 하는 것을 접했는데, 여전히 그렇게 불리나? 군데리아(웃음). ‘빵식’이라고 하지.
아직도 못 잊는 풍경이 있다. 어떤 군인은 어떻게 먹든 입 안에 들어가면 햄버거 맛 나는 건 똑같으니까 배식판에 놓인 빵, 고기 패티, 야채 샐러드를 각각 한 입씩 집어 먹는 해체주의 스타일인가 하면, 빵에 딸기잼을 정성스럽게 펴 발라, 고기 얹고 샐러드 얹어 완벽한 버거 형태로 만들어 먹는 사람이 있더라. 거기에 수프 한 입을 여유롭게 곁들이며. 나도 초반에는 햄버거처럼 만들어 먹었다. 그러다 점점 나만의 방식이 생겼다. 빵식일 때는 시리얼도 거의 같이 나온다. 빵을 뜯어서 시리얼 탄 우유에 좀 넣고, 거기 딸기잼도 휘휘 뿌려서 우유에 말아서 먹곤 했다. 빵식이 일주일에 한 번 나왔나 그렇다.
서른에 입대했다. 입대 전 마지막 활동이 뭐였나?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 3> 촬영하다가 입대했다. 3일 전에 알아서, 나도 팬도 모두가 많이 놀랐지.
그런 경우가 다 있나? 그래서 <식샤를 합시다 3>가 조기 종영 했는데, 마무리를 잘해야 하니까 3일 동안 부지런히 촬영했다. 입대 당일 새벽까지 촬영하고 헤어 숍에 가서 머리 밀고 바로 들어갔다.
입대하던 날 기억하나? 비가 내렸다. 날씨까지 그러니까 조금 우울했지. 동시에 설레는 부분도 조금은 있는 양가적 감정이 들었다. 어쨌든 새로운 환경이 펼쳐진다는 건 설렘과 두려움 등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니까.
군대에서도 전과 같이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태도나 군대 생활하면서 이루고 싶었던 뭔가가 있나? 특별히 없었다. 물론 초반에는 대다수처럼 나도 빈 시간을 이용해 공부하겠다거나 많은 걸 느끼고 나가겠다는 거창한 뭔가를 잠깐 떠올렸던 듯하다.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게 힘들어서 이것저것 해보려고 한 적도 있는데, 그 생활과 환경에 적응하면 처음에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결국 전에 살던 바와 비슷해진다. 그래도 좀 새로운 게 있었다면 책을 읽었다는 것. 요즘 군인들이 ‘녹이다’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독서로 시간을 녹이곤 했다.
‘찢었다’ 같은 새로운 뉘앙스의 동사인가? 1시간이라도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는 장병들의 마음이 담겼달까(웃음). 일과 후 생기는 빈 시간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다 보니 마음이 평화로워서 집중은 잘된다. 책으로 시간 많이 녹였지.
어떤 책을 읽었나? 여행 책을 자주 봤고, 소설은 몇 권 시도해보니 나랑 안 맞는 것 같아서 에세이 위주로 읽었다. 부대에 군인들 보라고 비치된 책이 많다. 휴가를 받기 위한 ‘필독서’ 중에 자기계발서가 많은데 자기계발서도 여러 권은 못 보겠더라.
필독서? 필독서로 지정된 책을 많이 보면 휴가가 주어지는 시스템이 있나? 몇 권 읽고 독후감 쓰면 마일리지가 쌓이는 식으로. 물론 지휘관이나 대대장님 스타일에 따라 다르긴 하다. 나 독후감 여러 번 썼다.
당신이 연예인이라고 주목하는 시선도 있었겠지? 처음 훈련소에서 다 같이 샤워할 때 조금(웃음). 그러곤 금방 괜찮아져서 거리낌 없이 지냈다. 아, 원래 낯을 가리는 편이었는데 군대에서 그 점은 많이 변했다. 군대도 기본적으로 사회 생활이 이뤄지는 곳이다. 그리고 용사들 사이에서 상담해주는 특수 보직인 ‘또래 상담병’이라고 있는데, 보통 나이 많은 사람이 맡게 되는 거라 내가 그 역할을 하면서 많은 이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윤두준이 또래 상담병으로 남들 상담을 해줬다고? 그걸 하면서 느낀 점이 많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이 어떤 이들에겐 당연하지 않구나, 겉으로 보기에는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속마음 들어보면 인간관계에 문제 있는 사람이 많구나 하는 것들. 외적으로나 생각하는 면으로나 어른스러운데 알고 보면 20대 초반인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저 나이 때 저런 생각까지는 미처 못했는데 요즘은 변했구나 싶기도 했고.
한 공간에서 몇 명이 생활했지? 14 명. 그런데 또래 상담병은 전 병력을 대상으로 한다. 우리 부대가 100명 정도였다. 나 혼자 하다가 나중에 한 명 더 생겨서 우리 둘이 열심히 임했다. 내가 전문 상담가도 아니기 때문에 능력에 한계는 있었지만, 상담을 요청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다. 잘하려고 심리 상담 책도 찾아보면서.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겠다. 친구와 별 목적 없이 대화하는 거라면 스스럼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 있는데, 상담이라는 건 명확한 목적이 있는 일이다. ‘잘 이야기해서 마음을 안정시키거나 고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줘야겠다’는 목적이 머릿속에 딱 자리 잡히니까 말을 하기 전에 뇌에서 이러저러한 수많은 과정이 일어나면서 입으로 말이 쉽게 안 나온다. 어려우면서 재밌는 경험이었다. 잘 이겨내려나 걱정되는 친구들도 있다.
앞으로 예능에 출연하면 군대 얘기 많이 하게 되지 않을까? 오늘의 대화가 군 생활의 아카이브를 정리하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지만 뭐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소소하다. 게임을 즐기는데, 내가 게임을 좋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참 자주 했다. 웬만하면 다들 게임은 하기 때문에 외출하면 다 같이 PC방 가서 게임하고 놀았다.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 심지어 나랑은 나이 차도 나는 애들인데 게임이라는 공통분 모마저 없었으면 내가 이 속에서 잘 어우러질 수 있었을까 싶어 안도감마저 들었다. 나를 동네 형처럼 생각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다들 잊고 있다가 ‘엇, 맞다, 이 형 서른두 살이지’ 이런 분위기였다.
가수 데뷔를 몇 살에 했나? 스물한 살.
군에 가기 전까지 웬만큼 커리어를 안정적으로 다져놨다고 생각하나? 꿈은 이뤘다. ‘큰 공연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가수가 되자’는 정도가 어릴 적 꿈이었다. 이제는 커리어에 대한 욕심보다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지내자’는 생각이 강하다. 쉽지 않은 일이지. 현재 나의 가장 큰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활동 재개를 앞두고 가장 크게 자리 잡은 생각인가? 그 꿈이 앞으로의 연예 활동에 기준이 되겠지? 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네. 무난함과 적당함에 대한 바람이 커졌다. 원래는 ‘굵고 길게’ 주의였다면 ‘가늘고 길게’ 쪽으로 성향이 좀 바뀌었달까. ‘길게’보다 ‘나와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 모두가 만족하게’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사실 이런 걸 정해놓는 게 무의미한 것 같다. 많은 일과 많은 반응이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나고 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데뷔 후 비스트와 하이라이트로, 또 연기자로 10년 가까이 달리다가 군대에서 한 번 멈추고 리프레시하는 시간을 가진 게 생각에 큰 영향을 끼쳤나 보다. 안정감이니 적당함 같은 말을 하면 누군가는 나를 열정 없고 배부른 사람으로 볼까봐 걱정도 된다. 뭐 그렇게 비쳐도 어쩔 수 없겠다. 지금처럼 속도가 빠르고 수많은 반응이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가운데서는 그에 따른 피로감이 모두에게 분명 있다. 그 속에서 남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나도 몰랐는데, 내가 상처를 받고 나약해진 면이 있었더라 .
마인드로는 적당함을 추구해도 상황이 당신을 그렇게 안 놔두는 일이 생길 텐데.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다만 그 개수를 줄이겠다는 거다. 닥치는 대로 다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효율을 내기도 힘들다. 정말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건방지게 보셔도 그게 나를 지키면서 오래 잘 가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뿐 아니라 내 주변이, 연예계가, 모든 사람과 이 세상이 평화롭게 흘러가길 바란다. 그것들이 각자 따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지금으로선 코로나가 어서 종식되길 바랄 뿐이다.
전역 후 활동을 시작해야 하는데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답답한가? 그런 게 아니라, 부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심각하다는 체감을 일찍부터 크게 했다. 군대는 단체생활이니 위생이나 조심성을 더욱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가? 우리가 단체생활을 하기 때문에 더 심각하게 느끼나?’ 했는데 나와 보니 정말 심각한 상황이잖아.
심적으로 위축되는 상황에서는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평상시와 크게 다름없는 일상생활, 태도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훌륭한 일일 것이다. 평소 당신은 어떤 일에 웃고 행복을 느꼈나? 뭐 실없는 농담, 축구, 여행 정도. 행복은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찰나의 순간으로 왔다 간다. 그러니까 그 찰나의 빈도가 잦아야 행복감을 자주 느끼겠지. 맞아, 여행을 정말 떠나고 싶었다. 내가 일하며 해외에 그렇게 자주 나갔으면서 가족과 같이 해외 여행 한번 한 적이 없더라. 입대하는 순간부터 계획을 세웠다. 날짜까지 다 잡아놨는데….
그저 의젓한 아들이었을 것 같은데 군 생활 거치며 좀 살가워 진 면도 있나? 자대 배치를 받고 전역하는 날까지 하루도 안 빼놓고 어머니와 통화했다. 그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 통화했으려나? 매일 저녁 6시경에는 습관처럼 통화를 해야 둘다 안심이 됐다. 그런데 전역했더니 슬슬 또 까먹고 있지(웃음).
멤버들이 모두 군대에 있다. 하이라이트에서 윤두준이 제일 먼저 사회에 컴백했는데, 그들에게 한마디 남기면서 아름답게 마무리한다면? 내가 이렇게 화보 인터뷰를 하고, 앞으로 방송에 나오는 모습을 그 안에서 보면 부럽기도 하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 거다. 내가 먼저 전역했다는 건 빨리 입대했다는 거니까 그 느낌을 겪어봐서 안다(웃음). 그냥 힘내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나에겐 연예계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가 바로 멤버들이다. 우리끼리 워낙 가깝다 보니 내 친구와 멤버들의 친구가 서로 친구가 되기도 했다. 멤버들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또 다른 인연이 생기는 것 보면 뿌듯하고 신기하다. 인연이라는 게 확실히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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