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미스터트롯>의 임영웅, 영탁, 장민호, 김희재의 놀라운 순간.
최고 시청률 35.7%, 생방송 문자 투표수 773만. 세상에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이런 사건이 터질 줄은 몰랐다. 세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온 나라에 트로트 열풍을 일으킨 <내일은 미스터트롯> (이하 <미스터트롯>)은 ‘그들만의 리그’였다가 불현듯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장르를 순식간에 혁명적으로 끌어올렸다. 트로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든 지금 그 이상의 일이 이들로 인해 일어나고 있다. <미스터트롯>의 임영웅, 영탁, 장민호, 김희재의 놀라운 순간을 <더블유>가 목격했다.
임영웅
트로트가 품위 있을 때
임영웅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과거 팝페라를 하던 가수가 아닐까 짐작했다. 트로트의 핵심은 ‘꺾기’나 간드러짐 같은 기교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서 먼저 느낀 건 ‘드라마’와 부드러우면서도 풍부한 성량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처럼 트로트가 아닌 장르의 곡을 부를 때면 특히 그렇다. 임영웅 버전의 ‘보랏빛 엽서’를 들은 원곡자 설운도는 유튜브 채널인 설운도 TV를 통해 <미스터트롯>에서보다 자세한 소감과 평을 전했다. 임영웅은 그저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가사를 음미하면서 드라마틱한 연기를 해낸다는 것. 트로트 가수에게서 불쑥 팝페라를 떠올리게 된 까닭의 퍼즐이 맞춰진 듯 하다. 노래가 흐르는 몇 분 동안, 기교나 보컬 같은 것보다 더 큰 개념인 ‘이야기’와 ‘극’의 요소가 다가왔기 때문 아닐까?
“방송에 나가기 전에 많이 망설였어요. 잘하는 동료들이 여럿 참가한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1라운드만 통과해도 이득이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1라운드만 넘자던 사람이 최종 우승에 해당하는 ‘진’에 이르기까지, 그는 매번 ‘지금 당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가 택하고 보여준 모든 것이 그의 인생곡이자 필살기다.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예전에 <슈퍼스타 K>에서 우승한 울랄라 세션도 비슷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다 보여주지 말고 좀 아껴뒀다가 더 올라가면서 확 터뜨려야지’ 식의 ‘매력 분산 투자’란 아예 고려치 않은, ‘다음은 없다’는 태도. “와, 그들도 그랬나요? 저 지금 종아리까지 소름이 돋았어요.” 임영웅은 명민했다. 전 국민이 시청자인 만큼, 정통 트로트에 치우친 스타일보다 다수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보컬 스타일을 고려했다. “<미스터트롯>을 하기 전까지는 다르게 불렀어요. ‘바램’을 불렀을 때만 해도 최근 스타일과 또 달랐고요. ‘바램’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발라드 가수로 살던 그는 그냥 즐겨보자는 생각으로 나간 노래 대회에서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불렀다. 우승했다. 전에 없던 인정을 받은 거다. “발라드를 하던 시절, 목소리에 ‘뽕끼’가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제가 제 세대의 발라드보다 김광석, 유재하, 이문세 선배 님처럼 흘러간 발라드를 좋아해서 그러는가 보다 했죠. 지금 생각해보니 음을 낼 때 강약과 완급 조절을 자주 하는 스타일을 두고 하는 평가였나 봐요.” 발라드를 부를 때나 트로트를 부를 때나, 임영웅의 특기인 ‘감성’이 짙어지게 된 계기가 있다. “군대에서 모두 훈련을 나가는 어느 날, 저는 제외됐어요. 전 날 손가락 부상을 당했거든요. 산속에 친 텐트를 지키면서 이어폰을 끼고 친구가 보내준 음악 모음을 들었는데, 감성에 젖어들게 만드는 노래가 계속 흘렀어요. 그때 확 매혹당하는 인상적인 경험을 했어요. 산속에서 혼자 쓸쓸한 상황이기도 했고요.”
임영웅은 트로트의 매력으로 ‘직설적인 가사’를 꼽는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무조건 무조건이야’처럼 돌려 말하지 않는 시원함. 과거에는 멋있게 부르는 일에 신경 썼다는 그는 이제 가사의 맛을 안다. 노래를 부르기 전에는 가사를 종이에 써본다. 한 곡의 감정을 하나의 원이라고 생각하며 전체적인 감정선을 잡아간다. 그렇게 미리 파악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면, 한 단어나 문장을 내뱉을 때마다 그에 관한 이미지가 떠올라서 오히려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트로트의 직설적인 가사도 그런 작업을 거친 임영웅식 드라마와 만나면 품격이 생기는 것 같다. “음악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그 음악 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분이 사랑도 해주고 있어요. 하던 걸 꾸준히 계속하는 게 이 열기에서부터 시간이 흘러도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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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입대 전까지 그가 꿈꾼 음악 스타일은 크러시나 자이언티 같은 네오 솔이다.
* 초등학교 5학년 때 싸이의 ‘챔피언’을 부르면서 비브라토를 넣었더니, 짝꿍이 “너는 왜 목소리를 떨어?”라고 했다. ‘내가 남들과 다르게 부르나, 잘못된 걸까’ 의아했던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6학년 때는 별명이 ‘진달래꽃’이었다. 마야의 ‘진달래꽃’을 기가 막히게 불러서.
* 메시를 좋아해서 바르셀로나 FC를 응원한다. 메시가 팀을 옮기면 애정하는 팀도 바뀔 확률이 높다. 촬영과 인터뷰가 길어지자 자신이 출연한 예능 <뭉쳐야 찬다>를 본방사수하지 못할까봐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축구를 할 때 ‘센터 백’ 포지션의 왼발잡이다.
* 아버지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은 ‘차 안에서, 창문을 내린 창틀에 팔을 걸치고 운전하시던 뒷모습’이다. 임영웅이 다섯 살 때였다.
영탁
막걸리 한 잔의 기적
“요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기분이에요.” 구김살 없이 흥 많은 그의 기질을 대변하는 듯한 둥근 테 안경을 쓰고 촬영장에 등장한 영탁이 건넨 첫 마디다. 실로 그랬다. <더블유>와의 인터뷰를 불과 하루 앞둔 4월 11일 영탁은 MBC <쇼!음악중심>의 무대에 섰다. 솜털 난 젊은 아이돌의 무대를 이어받아, 영탁은 <내일은 미스터트롯> 결승전 당시 선곡한 ‘찐이야’로 구성진 한 곡을 뽑아냈다. 소위 ‘귀에 때려 박는’ 대찬 성량을 뽐낸 이날을 영탁은 이렇게 기억한다. “트로트는 변방의 장르다 보니 서는 무대가 한정적이에요. <쇼!음악중심> 리허설 당시 관객석에서 앞서 무대를 마친 뽀송뽀송한 아이돌 친구들을 보는데 감회가 참 새로웠죠. 원래라면 박상철, 진미령 선배와 한 무대에 서는 게 맞잖아요?” 영탁이란 이름 두 자를 세상에 알린 음악을 단 한 곡만 꼽자면, 그건 <내일은 미스터트롯> 본선 2차 무대에서 선보인 강진 원곡의 ‘막걸리 한잔’일 것이다. 전주가 흐르기 직전 시원스러운 고음과 함께 내지른 ‘막걸리 한잔’이란 첫 소절은 아직은 쌀쌀한 봄임에도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찾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4월 중순을 지나는 현재 TV 조선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된 당시 무대 영상은 조회수 1000만을 넘기며 막힘없이 순항 중이다. 이는 웬만한 인기 아이돌의 뮤직비디오 조회수를 웃도는 숫자다. 영탁은 이 무대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딴 ‘영탁 막걸리’(예천양조)의 광고 모델이 되기도 했다.
가요계에서 영탁은 꽤나 잔뼈가 굵은 ‘실력자’로 알려져 있다. 2005년 영화 <가문의 위기 – 가문의 영광 2>의 OST로 데뷔한 그는 2007년 <사랑한다>는 앨범을 발매하며 본격적으로 음악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2009년 4인조 발라드 그룹 ‘지방아이들소울’의 일원으로 SBS <스타킹>에 출연하지만 대중에게 그의 이름을 알리기엔 부족했고, 이후 생계를 위해 학원, 대학가를 전전하며 보컬 강사로 생활했다. 이때부터 영탁은 자신이 ‘진짜로’ 잘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했다. “되돌아보면, 스무 살 대학생 OT 때 제가 사람들 앞에서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불렀더라고요. ‘안녕하세요. 02학번 박영탁입니다’라는 소개를 마치고 한 곡 뽑기 시작했는데 소위 ‘빵 터진’ 거죠. ‘쟤 뭐야?’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어요(웃음). 삶의 사이사이에 트로트를 즐긴 시간이 분명하게 있었어요. 2016년 ‘누나가 딱이야’라는 곡으로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는데, 여러 장르를 경유해 비로소 제 집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어요.” 영탁은 자신을 흥 많고 유쾌한 에너지가 넘치는 가수라 표현한다. 자신이 대중에게 즐거운 에너지를 전하면, 역으로 대중도 자신에게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를 춤추고 노래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일확천금 같은 요행을 바라지 않고 한 걸음씩 천천히 걷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공연이 끝나면 관중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저 일흔까지 노래 할 거니까 계속해서 저와 함께 걸으며 좋은 에너지 공유해주세요’라고. 훗날 나훈아, 남진 선배님처럼 역사에 길이 남는 가수로 기억되는 게 목표예요. 그러려면 잘 걸어야겠죠? 여태 그렇게 잘 걸어왔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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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목소리를 망치에 비유한다. 무언가를 두드렸을 때 강렬한 울림을 만들어내는 망치는 시원스럽게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를 표현하기에 제격인 단어다.
*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게 만들어준 데뷔곡인 ‘누나가 딱이야’는 사실 10분 만에 가이드 녹음이 끝났다. 못해도 30분이 소요되는 가이드 녹음이 이토록 빨리 종료되는 순간, 영탁은 ‘됐다’라는 운명적 기운을 느꼈다고 말한다.
김희재
스타의 DNA
타고나길 연예인인 사람이 있다. 끼와 자신감과 충만한 에너지, 거기에 유독 또렷한 눈빛까지, 도저히 위장이라는 걸 하지 못한 채 온몸으로 그 기운을 발산하는 특정 인류. 김희재는 그런 사람이다. 그의 평생 첫 무대는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 날, 누구나 아는 한 대형 마트에서 마련한 장기자랑대회였다. 1등 상품인 게임기를 원했던 사촌 누나가 김희재 대신 참가 신청을 했고, 그는 장윤정의 ‘어머나’를 불렀다. 첫 경험에 짜릿함을 느낀 데다 1등이라는 보상까지 있었으니, 바로 그때 김희재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지 않았을까? “아빠가 젊을 때 가수 준비를 하셨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됐지만요. 저보다 더 끼가 많으세요. 저는 어릴 때부터 늘 차 안에서 아빠가 틀어놓은 트로트를 듣고 자랐어요.” ‘왜 트로트인가’라는 질문은 굳이 던질 필요가 없었다. 그의 주변에 매일같이 트로트가 아닌 팝이 흘렀다면, 그는 K–Pop 댄스 가수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할 뿐이다.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무조건 가수가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중1 때 SBS <스타킹>에 출연해서도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호응할지 감이 있었던 게 생생히 기억나요.”
미성을 지닌 그는 여자 가수의 곡도 능숙하게 표현한다. <미스터트롯> 결승 때 그가 김수희의 ‘잃어버린 정’을 부르자 작곡가 조영수는 ‘줄 수 있는 점수는 다 줬다’고 했다. 장르와 분야에 상관없이 김희재에게 최고의 스타는 누구일까? “비욘세요. 저는 바로 그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완벽한 퍼포먼스에 완벽한 보컬, 거기에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까지. 그 정도의 파워를 갖춘 남자 가수는 많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도 좋아합니다.” 음악 외 관심사는 딱히 없지만 음악과 관련된 거라면 뮤지컬, 연극, 뭐든 관심이 있다는 김희재는 선하고 모범적인 말만 할 때도 그 사이에서 진심이 함께 배어 나오는 듯했다. “제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모든 판단과 결정을 스스로 알아서 했죠. 그래서 돈을 정말 많이 벌면 재능이 있는데 경제적인 이유로 꿈을 접으려는 아이들을 후원하고 싶어요. 누구든 꿈이 있다면, 일단 그 길을 가보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할 때 그는 답변 하나도 대충 하지 않겠다 는 듯이 눈을 똑바로 맞췄다. 그러던 김희재가 한참 동안 답변을 못하고 꽤 긴 정적 속에 고심과 갈등을 거듭한 순간이 있다. ‘콜라보’하고 싶은 가수가 있는 지 가볍게 물어봤을 때. “각기 다른 스타일의 매력을 지닌 가수 여럿을 마음속에 담고 있는데, 아무래도 흔들림 없이 계속 떠오르는 한 분은 린 누나예요. 그 음색을 너무 좋아해요. 저, 발라드도 자신 있거든요. 트로트를 할 때와는 아예 다른 창법으로 부를 수 있어요. 우리 목소리가 만난다면 달달한 것도 좋겠지만 굉장히 슬픈 발라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역시, 김희재는 계획이 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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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돌 연습생 생활을 2년 정도 한 건 트로트 가수를 하기에는 너무 어려서 훗날을 도모하며 우회한 전략이었다. 보컬은 물론 춤의 기초부터 제대로 훈련한 덕에 ‘춤희재’로 거듭났다. 그러나 <미스터트롯>에서 도전한 폴 댄스는 생활 근력이 필요한 또 다른 세계였으니, ‘이렇게 내 몸을 컨트롤할 수 없는 춤도 있구나’ 깨닫는 경험이었다고.
* 가수 린에게 SNS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누나를 너무 좋아해서 누나네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고백했다.
* 초등학생 때, 지금 친이모와 다름없는 트로트 가수 서지오의 ‘아카시아’ 무대 영상을 우연히 보고서 멋지고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느꼈다. 그 후 서지오가 공연하는 자리에서 그녀의 노래를 다 따라 부르며 호응했고, 서지오가 그 모습에 감동하자 사회자가 김희재를 무대 위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장민호
점 대 점으로 만나는 트로트
족히 10년 묵힌 장을 담은 항아리. <미스터트롯> 준결승 당시 남진 원곡의 ‘상사화’를 선곡한 장민호의 무대를 감상하며 스친 생각이다. 깊이가 느껴지는 구슬픈 음색과 음악에 한층 무게를 싣는 유려한 무대 매너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 법. 1997년 4인조 아이돌 그룹 ‘유비스’로 가요계에 등장해 데뷔 23년 차를 맞이하는 오늘날 ‘트로트계의 신사’로 불리기까지, 장민호에게는 굽이진 언덕길을 연상시키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유비스로 짧게 활동하며 쫓기듯 1세대 아이돌의 반열에서 물러난 이후, 2004년 발라드 그룹 ‘바람’으로 재기를 꿈꿨지만 이 또한 녹록지 않았다. “좀처럼 쉽게 풀리는 일이 없었어요. 그러다 2011년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는데, 시작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성인 가요 시장이 각축전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했죠. 어린 마음에 금세 이름이 오르내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17년의 무명 생활을 청산한 사건은 2013년 ‘남자는 말합니다’라는 곡을 발표하며 벌어진다. “처음 곡을 받았을 땐 가사가 너무 직접적이어서 망설였어요. ‘여행 가서 낫게 하리다’, ‘안아봅시다 나의 여자여’란 가사를 총각 시절 불러야 했기에(웃음). 그런 데 다음 날 일어나 음악을 재차 듣는데 ‘무조건 되겠다’란 예감이 운명처럼 찌르듯 다가왔죠.”
사람들은 장민호의 23년이란 호락호락하지 않은 경력과 굵직한 선이 스치는 얼굴(화보 촬영장에서 그를 보고 ‘배우 마스크’ 같다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스태프들이 있었다)과 상반되는, 개그 코드 다분한 너스레를 그만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다. 실제 ‘화보 촬영은 얼마 만이냐’는 에디터의 질문에 1997년 데뷔했을 당시인 ‘조선 시대 직후 한 번 찍고 오랜만이다’고 답하거나, 촬영 중간중간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켜 팬들과 소통을 빙자한 수다를 떠는 식으로 촬영장의 분위기를 한층 ‘업’시켰다. 물론 트로트 가수로서 자신만의 강점을 묻는 질문엔 사뭇 진지한 답변을 내놓기도 한다. “과거 실패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마음의 밭이 남들보다 넓은 것 같아요. 무엇이든 스펀지처럼 흡입하는 사고관과 아이돌 시절부터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온 경험이 전부 자산이 되었죠.” <미스터트롯>을 통해 장 아무개의 인생으로 끝날 수 있던 삶이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삶으로 ‘역전’되었다고 전하는 장민호는 트로트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트로트는 ‘점 대 점의 만남’이에요. 다른 장르의 대중가요와 다르게 무대에서 관객 한 명, 한 명과 직접 호흡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점 대 면’이 아닌 ‘점 대 점’으로 서로가 만나게 되죠. 진심을 다해 소통할 수 있기에 저는 앞으로도 트로트에 빠져 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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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민호는 <미스터트롯> 경연 중 최고의 순간으로 참가자 정동원과 함께한 ‘파트너’의 무대를 꼽는다. 무대에 오르는 순간부터 내려올 때까지 단 한 톨의 불편함도 없었다고.
* 장민호에게 가장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곡은 2013년 발표한 ‘남자는 말합니다’. 트로트 가수를 준비할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안타까움에, ‘남자는 말합니다’를 부를 때면 언제나 아들이 엄마에게 노래를 불러준다는 생각을 가슴에 아로새긴다.
- 패션 에디터
- 김신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전여울
- 포토그래퍼
- 박종원
- 헤어
- 김승원
- 메이크업
- 이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