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감았다 뜨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맑은 눈망울과 가녀린 몸이 그리는 동선에서 배우 공효진만의 강렬한 오라가 전해졌다. 특별한 장치 없이 버버리(Burberry)의 우아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을 온전히 표현해내는 그녀의 내면에 응축된 순수한 에너지를 포착했다.
동백꽃의 계절인 겨울은 지나가고 있지만,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여운은 쉬이 떠나지 않는다. 토닥여주고 싶지만 불쌍하진 않았던 여자. 박복한 팔자 운운하면서도 씩씩하게 두루치기를 팔며 사랑받고 사랑을 주었던 인물. 공효진은 그 누가 동백이를 연기했어도 좋은 파장이 있었을 거라고 말했지만, 맡는 캐릭터마다 극 중 인물과 현실의 공효진이 동일인이라는 착시를 일으키는 그 연기는 데뷔 20년 만에 동백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증명됐다. “저는 주로 또래 여성이 좋아할 만한 드라마를 했어요. 여자가 주체가 되고, 그 인물의 성장기가 중요한 줄기인 작품요. 그런데 <동백꽃 필 무렵>은 부모님 세대, 주변의 남자들도 너무 좋아해줘서 고마웠어요. 신기해요. 작품을 마친 후 제가 연기한 인물을 두고 ‘잘가 요’라고 하는 말도 처음 들어봤어요.” 배우 중 누구보다 화보 촬영을 많이 해봤을 공효진은 조용하고 말없이, 능숙하며 침착하게 촬영에 임했다. 마지막 옷을 갈아입고 마주한 그녀는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솔직하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동백이와 동백이가 받은 사랑에 대해 말할 때면, 거리낄 게 없었던 공효진의 표정에서 놀라움 같은 감정이 배어 나왔다.
재작년에 한 인터뷰를 보니 역술가에게 ‘2019년 운세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공효진의 2019년도에 KBS <동백꽃 필 무렵>이 있었으니, 그 운세가 맞았다. 역술가가 ‘콩쥐가 팥쥐 되는 해’라는 표현을 썼다(웃음).
콩쥐가 팥쥐로 변신? 팥쥐가 콩쥐 되는 게 아니라? 아마 고생을 덜 한다, 팥쥐처럼 편하게 산다는 좋은 맥락으로 해준 말 같다. 열심히 일해도 그에 대한 보상을 받기가 어려운 쪽이 아니라는 뜻에서.
2020년 토정비결도 봤나? 그런 걸 궁금해하며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두렵기도 하고, 작정하고 볼 만큼 관심이 크지도 않고. 그런데 몇 년 전에 누가 아주 유명한 분이 있다고 소개해서 내 인생의 긴 미래까지 종합적으로 본 적이 있다(웃음). 정성스럽게 프린트물로 내용을 뽑아줘서 가끔 그걸 보기도 하는데… ‘2019년도부터 아주 좋다’는 말이 나온다. 어쩌다 역술 같은 걸 볼 때면 좋은 말을 듣는지라 이분도 좋게 얘기해주시나 보다 그랬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누가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공효진의 승률 데이터’ 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걸 봤다. 한마디로 공효진이 나오는 드라마는 늘 평타 이상은 한다는 내용이었다. 연기한 지 20년 됐는데, <동백꽃 필 무렵>을 하고서야 그런 말을 많이 듣는 것 같다. 물론 그 동안 주변으로부터 ‘넌 잘못된 적은 없잖아’ ‘이번에도 잘될 거야’ 같은 말은 듣곤 했다. 주로 작품이나 반응을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업계 쪽 사람이나 동료들의 말이었다. 대개의 경우는 최근 들어서야 ‘어? 그러고 보니 공효진이 잘 안 된 건 없었네?’ 쪽에 가까운 듯하다. 이제야 많은 분들이 더 확실하게 인정해주는 건가 싶어서 나에겐 새롭다.
‘이번에도 잘될 거야’ 같은 말 앞에서는 무슨 생각이 들었나? ‘또 잘되면 이상하지 않을까.’ 좋은 일만 계속되면 폭풍전야처럼 오히려 불안하니까. 그런 생각을 한 지 10년 정도 됐다.
한 번쯤 여기서 더 치고 올라가고 싶다는 바람은 없었나? 이번 드라마를 하기 전에, 있었다. 내 인생에 전 국민이 다 알고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을 일으킨 출연작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런 작품이 나타날 때면 ‘와, 저건 대체 뭘까? 어떻게 하면 첫 방송부터 17% 시청률이 나올까? 얼마나 큰 기대를 받는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도 나는 불을 지피면 불이 쭉 잘 타는 경우가 많았다.
우연히, 그리고 무심코 <동백꽃 필 무렵> 1회를 봤다가 당신과 강하늘의 호흡에 깜짝 놀라서 드라마가 잘되겠다 싶었지만, 그 정도로 흥행하고 회자될 줄은 몰랐다. 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때 는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 촬영과 시기가 겹쳤고, 편성 일정이 조금 연기되는 분위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미리 받아본 대본상 드라마 내용이 상당히 밀도 있어서 제대로 준비 없이 임하기엔 무리지 싶었다. 편성이 꽤 미뤄지며 작품에 합류하게 됐다. 작가님에게 함께 작업하지 못 해 너무 아쉽다는 문자를 보낼 때 연재물을 기다리는 독자처럼 ‘그런데 다음 회 대본 좀 읽어볼 수 없을까요?’ 할 정도로 궁금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재밌는 드라마이면서 주저 없이 좋은 드라마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임상춘 작가는 인간의 선함과 기적을 믿으면서 긍정적 메시지까지 심었다. 동백이라는 캐릭터의 가장 핵심적인 느낌이 뭐라고 파악했나? 위로해주고 싶은 사람. 살면서 누군가를 위로할 때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되겠나 싶은 경우도 있는데, 동백이는 위로를 건네면 그 인물이 너무나 힘을 낼 것만 같은 느낌을 줬다. 다만 연기할 때 청승은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워낙 극적이고 에너지가 활활 타오르는 캐릭터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동백이는 그러지 않은 쪽으로 극의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었는데, 그럴 때 혼자 울상 짓고 청승 떨고 있으면 그 모습을 계속 보는 사람도 힘든 일이다. 슬퍼도 아무렇지 않게, 밝게, 사람들이 자기를 두고 뭐라 그랬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인물이 바로 동백이어서 더 측은해 보였던 것 같다.
인상적인 반응이 있었나? 드라마가 끝나면서 ‘잘 가요’ 같은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다. 작품 속 인물에게 ‘앞으로 행복하세요, 아무개와 영원히 사랑하세요’ 하는 것에 비하면 ‘동백아 잘 가’는 그저 의례적 인사라거나 두루뭉술하지 않은, 정말 가까운 이에게 하는 따뜻한 인사 같았다. 아주 쿨하게 살고 드라마 같은 것에 잘 안 빠져들 것 같은 어느 오빠는 오랜만에 날 보자마자 ‘동백아! 널 보니까 마음이 울컥해! 보면서 많이 울었어’ 해서 놀랐다. ‘여성 호르몬이 늘었네’라고 웃어넘겼지만(웃음).
작품을 고르거나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 주변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편인가, 본인의 감을 믿는 편인가? 나의 호불호를 믿는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편이다. 그래서 작품의 경우, 설사 크게 성공하지 못해도 내가 원했기에 상처받거나 힘들지 않았다.
배우 공효진의 독보적인 면모는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 전형적이지 않은 연기에 있다. 훈련과 계산보다 본능과 감에 따른 연기일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당신의 연기 접근법이 늘 궁금했다. 내가 하는 순간의 몰입을 믿는 편이지만, 데뷔 후 20년 중에서 처음 10년과 그 이후가 여러 면에서 꽤 다르다. 예전에 나는 베짱이과였다. 현장에 가면 알아서 되겠지, 그게 내 메소드인 양 핑계 삼으면서 사실은 태평했던 것 같다. 사전에 많이 준비해서 좀 더 전체의 흐름과 맥락을 알면, 내 신뿐 아니라 다른 배우의 신에서도 내가 힘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상대 배우와의 앙상블에 있어서도 ‘설렌다’로 설명된 연기를 그저 눈을 못 마주치는 정도로 표현할지, 아니면 정말 창피한 상황에 처했을 때처럼 표현할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카메라 앞에 있으면 학습된 연기를 하기가 쉬운데 그러지 않으려면 용감함이 필요한 것 같다.
당신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용감함, 용기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용감함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나오는 것 아닐까? 나는 연기를 처음 할 때부터 준비가 됐다거나 공부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막하듯이 아무렇게나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워낙 처음부터 그랬던 사람이었으니 반감을 덜 사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정석이 아닌 방법들, 이를테면 이상한 표정을 짓든 연기 같지 않은 연기를 하든 그게 문제가 된다고 움츠러들 일도 없었다. ‘이렇게 해도 되네?’ 싶은 걸 나름대로 발전시켜왔다. 애초 준비된 배우가 아니라는 불안감 때문에 순간에 더 집중하려고 했고, 그를 통한 훈련도 됐을 거다.
시청자와 관객은 하나의 결과물만 보지만 촬영 현장에서는 배우의 다양한 시도가 있을 것이다. 잡지 화보에 실리는 어느 한 컷 뒤에 수백 장의 시도가 있듯이. 한 장면을 두고 테이크를 갈 때 마다 다른 시도를 하나, 한 가지를 심화시키는 편인가? 테이크마다 다 다르게 가려고 한다. A를 해봤으면 그거보다 좀 더 잘한 A+를 시도하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B와 C를 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안전한 것 하나를 했으면 그다음에는 과감한 것, 혹은 아예 상반된 것으로 전환하기도 하고. 사실 아무리 전체를 파악하려고 해도 이야기가 화면상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배우로서 100퍼센트 꿰지는 못한다. 서로 다른 버전의 연기가 있으면, 감독님이 편집할 때 이야기가 훨씬 풍부하고 다양해질 수 있다.
지금의 공효진이 막 데뷔를 앞둔 10대 시절의 공효진에게 한마디 건넨다면, 뭐라고 하겠나? 더 별난 아이여도 좋다고. 난 너무 평범했거든.
공효진이? 평범? 왜 자기만의 생각 강하고, 또래가 좋아하는 것 따라 하지 않고 특이한 캐릭터 들 있지 않나? 남들 안 하는 거 하고. 나는 남들 하는 것만 하던 아이였다(웃음). 요즘 10대들 중에 그 나이 때부터 자기 색 강한 아이들 보면, 어릴 때부터 용감하구나 싶다.
연기를 시작하고, 연예계라는 곳에 발 들이면서 서서히 달라졌나? 뚜렷하게 예쁘고, 뚜렷하게 잘하는 동료가 많은 이 업계에서 나는 모자란다는 생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넓지 않은 영역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좀 바뀌기 시작한 게 아까 말한 10년 정도 전부터다. 영화 <미쓰 홍당무> 를 했을 즈음이다. 그 작품 이후 겁도 많이 없어지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게 됐다. 내가 변화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칭찬과 지지와 응원 때문이었다. 그게 참 사람을 자유롭고 용감하게 만든다. 작품 활동의 반경이 점점 넓어지면서 아무리 평범한 역할이 와도, 혹은 괴상한 역할이 와도 내가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붙었다.
20년에 걸쳐 연기력과 개성을 인정받고, 패셔니스타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긴 시간과 경험 끝에 현재 남아 있는 교훈은 뭔가? 내면을 키우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뻔한 말 같지만 그렇다. 보여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니 외면을 가꾸려고 노력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안을 살찌우고, 곧고, 건강한 사람이 되는 일이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겠지. 마음속에 화나 미움 같은 감정을 키우지 않고, 사랑하고, 온화하게.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성취감을 경험해야 하는 것 같다. 나에게 성취가 없는데 다른 사람을 좋게 보긴 힘든 일이니까. 그런데 세상에 꼭 일에서의 성취만 있는 건 아니다. 식물 하나를 키우면서도, 직접 작은 텃밭을 일궈 과일을 따면서도 성취감을 느끼고 에너지를 채울 수 있다. 나 역시 자연에서 얻는 성취감이 크다. 자신이 어떤 것에서 성취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인지 찾아가는 게 필요하겠다.
성취의 감각을 경험하고 근육 키우듯이 계속 키워가는 일. 결국 가장 나다운 것을 들여다보는 과정 같다. 지금 공효진은 공효진다움을 충분히 잘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다. 요즘 들어 오리지낼리티의 중요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유행이나 남의 것을 따라 하지 않고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것을 찾아갔으면 한다. 유행과 동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버리고, 용감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했으면 한다. 나야 직업으로 인해 이것저것 입어보거나 취하는 경험을 많이 한 덕에 나다운 것을 찾기 쉬운 점도 있었으니 운이 좋은 경우다. 누구나 나의 독창성, 나의 특장점을 찾으면 그게 결국 자신의 클래식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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