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로 기계화된 미래를 가장 ‘예술적으로’ 점치는 방법. 랜덤 인터내셔널의 전시 <랜덤 인터내셔널: 피지컬 알고리즘>이 훌륭한 점괘가 되어줄 것이다.
100m² 규모의 전시장에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지만 무턱대고 빗발로 뛰어들어도 비 한 방울 젖지 않는다. 이처럼 우아한 시나리오를 가진 ‘첨단 폭우’는 2012년 런던 기반의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랜덤 인터내셔널이 공개한 작품 ‘레인 룸’이다. 첨단 기술을 동원해 인공 폭우가 내리는 신기루 같은 환경을 조성한 후 이와 교감하는 인간을 조명하는 레인 룸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인스타그램이 집계한 레인 룸의 해시태그는 총 6만3000개. 전시장을 찾았지만 소셜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 관람객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레인 룸의 인터랙티브 아트에 참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하며 인간은 점차 고도화된 기계를 생산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인간보다 더 인간을 잘 알고 대응하는 기계가 출현한다. 이때 인간과 기계는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가? 랜덤 인터내셔널의 작품 대다수는 이 같은 주제를 품고 있다. 사실 그렇게 새삼스러운 주제도 아니다. 일찍이 알파고가 인간과 바둑 대전을 펼치며 세상을 한 차례 휩쓸었고,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를 꿰찰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로봇세’를 징수하자는 이야기마저 들려오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10월 11일 인천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에서 개막한 전시 <랜덤 인터내셔널: 피지컬 알고리즘>의 간담회 장소로 향하며 어쩐지 전시장에서도 밝지만은 않은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 짐작했다. 전시를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는 ‘인간과 기계의 대화’이지만 앞서 얘기한 일련의 사건 때문인지 몰라도 ‘인간를 지배하는 기계’ 혹은 ‘기계의 역습’으로 끝날 것만 같은 불길한 시나리오를 머릿속에서 지우기란 어려웠다.
간담회에는 랜덤 인터내셔널의 멤버이자 주요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플로리안 오르트크라스(Florian Ortkrass)가 참석했다. 현대의 첨단 기술이 녹아든 작업 스타일과는 달리 플로리안은 캐주얼한 데님 재킷을 입고 악수를 청했다. 첫인상이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전시 도슨트는 시작되었다. 전시는 ‘조응: 바라보기’, ‘모사: 따라 하기’, ‘개체: 독립체 단계’로 확장하는 세 가지 키워드로 진행됐다. 머리 크기의 거울 64개가 관람객의 움직임을 감지해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작품 ‘Audience’로 전시의 포문을 연 후, 무채색 기계가 바닥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인간이 보행하는 듯한 형상을 띠고 다가오는 ‘Fifteen Points / Ⅱ’에 이르러 전시가 끝이 난다. 전시장을 빠져나오며 내린 결론은, 이들이 제시하고자 한 인간과 기계의 미래상이 결코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점차 기계가 리드하는 현시대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태도에 가까우면 모를까. “예술의 본질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 작품을 통해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간담회가 끝날 무렵 플로리안이 남긴 말을 쥔 채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약속한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우리는 제프 쿤스의 ‘게이징 볼’ 연작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작품이 주는 인상 때문인지 몰라도, 왠지 오늘 당신이 모노톤 의상을 입고 등장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데님 재킷이라니! 플로리안 오르트크라스 U.Mi–1이라는 브랜드의 재킷이다. 친구인 고지 오코노고르(Gozi Ochonogor)가 운영하는 브랜드다. 케냐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한 수학자인데, 지금은 이렇게 근사한 옷을 디자인하고 있다. <더블유>에서 관심 가져주다니, 그가 정말 좋아할 거다. 이건 꼭 기사에 실어달라(웃음).
전시명이 <랜덤 인터내셔널: 피지컬 알고리즘>이다. 무형의 알고리즘 앞에 ‘피지컬’이라는 다소 모순적인 수사가 붙었다. 기계적 알고리즘이 인생의 많은 것을 결정하는 변수로 떠오르는 것 같다. 금융 기관을 대신해서 알고리즘이 주택담보대출을 심사하고, 페이스북 계정이나 맞춤 광고를 추천하는 세상에 이미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결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가시화되지 않는다는 것이 알고리즘의 가장 큰 특징이다. 가려진 채 존재하는 알고리즘이 실제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물성을 가진 아트워크로 보여주고 싶었다. 무형을 유형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서 ‘피지컬’이라는 수사를 가져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Audience’가 가장 먼저 반긴다. 금속 받침에 부착된 거울 64개가 관람객의 움직임을 감지하면 일제히 고개를 움직인다. 기계 장치임에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느껴져서 살짝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웃음). 우리의 작업은 많은 부분이 ‘움직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람의 두뇌는 진화론적으로 생물과 비생물의 움직임을 빠르게 구분하는 방향으로 발달했다. 실제 사람이 생물학적 움직임이라고 인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50밀리초에 불과하다더라. ‘Audience’는 오로지 움직임만으로 살아 있는 생물처럼 비치는 것이 가능한지 실험하고자 했던 작품이다. 외형이 아닌 움직임으로 승부를 보는 작품이기 때문에 사람의 머리를 형상화하지 않고 가로 15cm, 세로 25cm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제작했다. 사람이 머리를 가누는 동작에 관한 정보가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서 한정된 범위로 작동하지만 그 움직임이 굉장히 자연스러울 거다. 실제 작품 앞에 섰을 때 거울을 관찰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던가? 작품의 아이디어는 굉장히 의외의 장면에서 얻었다. 연회장에 들어서는데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서였지(웃음).
사람과 흡사한 휴머노이드로 제작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글쎄, 과거 작품을 휴머노이드로 제작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그럴 계획이 없다. 물론 휴머노이드로 제작했다면 더 쉬웠겠지. 그런데 형질은 없지만 움직임만을 가진 작품에서 읽히는 미묘한 인간의 잔상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묻고 싶은 작품이었다.
랜덤 인터내셔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Swarm Study’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개미나 꿀벌처럼 떼를 지어 이동하는 군집의 움직임 패턴을 LED 불빛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최근 인공지능에서 떠오르고 있는 분야인 군집 지능(Swarm Intelligence)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들었다. 철새 떼가 에너지를 덜 소비하기 위해 V자 대형을 이뤄 비행하고, 개미가 무거운 나뭇가지를 운반하기 위해 군집을 이루듯 사회성 곤충이 집단행동을 할 때 발생하는 지능을 ‘군집 지능’이라고 부른다. 군집 지능은 뭐랄까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1980년대 무렵 과학자들이 군집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고자 연구하기 시작한 분야인데, 최근 들어서는 인간이 군집을 이뤘을 때의 행동을 예측하는 데 활발히 응용되고 있다. 특히 군사, 건축, 경제 분야에서. ‘Swarm Study’는 이름 그대로 군집을 추상화한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어떤 본능을 일으키는지에 관한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작품을 보고 ‘저런 방식으로 군집이 움직이는 이유가 뭘까?’라고 근본적인 질문을 품는 관람객이 있을 거다. 나아가 실제 군집 지능을 응용해 인간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는 기계가 있다면 우리의 능력으로는 알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이나 직관에 대해 어느 정도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계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게 된다면 질병이나 인종 차별 같은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을까?
2층 전시장에 도착하면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듯한 형상의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하는 신작 ‘Fifteen Points / Ⅱ’다. 2016년 공개한 ‘Fifteen Points/Ⅰ’과 비교했을 때 무엇이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드디어 조각이 걸을 수 있게 됐다(웃음). 원래는 고정된 형태였는데 이번에 길이 1.2m가량의 레일을 바닥에 설치하면서 조각이 움직이게 되었다. ‘Fifteen Points’ 연작은 엄청나게 고도화된 기술이 집약된 작업이다. 대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았거나 10년이라는 연구 기간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거다. 아이디어는 실험자의 신체에 15개의 센서를 부착하고 사람이 보행할 때 발생하는 움직임을 관찰한 캐나다 인지과학자 니콜라우스 트로이(Nikolaus Troje)의 연구에서 얻었다. 그는 실험을 통해 보행할 때 발생하는 하체의 움직임만으로 그 사람의 성별이나 기분, 체중을 추리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Fifteen Points’ 작업에 돌입했다. 강철 구조물에 전구 14개를 부착한 후 구조물을 움직여 마치 인간이 걷는 듯한 형상이 그려지도록 제작한 작품이다. 다행히 사람들이 작품을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인간의 보행을 떠올리더라. 사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지하는 데 있어서 핵심 요소가 하체다. 땅에 다리를 디딘 모습을 보고 인간은 다른 인간을 인지하도록 뇌가 설계되었다. 사냥꾼만 보더라도 반드시 하체를 가리는 가죽 치마를 입지 않던가. 치마를 입고 사냥감에 다가가면 사냥감이 생물이라고 인지하지 못해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예술가라기보다 과학자와 마주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웃음). 과학의 발전을 작품에 고스란히 들이는 작업 특성상 이후 프로젝트가 어떻게 전개될지 무척 궁금하다. 아이디어는 너무 많은데 지금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하.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현상에 관심이 많다.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서 늘 이쪽으로 촉수를 세우고 있다. ‘Particles’라는 가제로 부르고 있는 프로젝트도 현재 진행 중이다. 완벽한 무(無)에서 형태를 만드는 프로젝트인데… 그냥 이건 미스터리한 채로 남겨두고 싶다.
필립 바너드(Philip Barnard)를 비롯해 여러 인지과학자와 협업해오지 않았나. 그러면서 알게 된 인간의 행동 양식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었나? 문득 오래 고민하다 내린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이때 논리적으로 잘못 결정했다는 자명한 근거가 있음에도 방어 기제를 만들어 스스로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 많은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런 방어 기제 때문에 최초의 결정을 고수한다고 한다. 지금 영국에서 거주하고 있어 꺼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런 행동 때문에 브렉시트 같은 사태가 초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고백하자면 인지과학이라곤 영화 <매트릭스>에서 접한 것이 전부다(웃음). 좋은 영화지(웃음). 영화든 책이든 인지과학을 다룬 작품을 두루 즐기는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1979)와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1982)를 추천하고 싶다.
당신의 가장 ‘아날로그’스러운 취미를 알려줄 수 있는가? 예술. 예술가로서 취미가 곧 직업이 된다는 사실이 가끔은 저주처럼 느끼기도 한다. 물건을 수리하는 것도 좋아하는데, 사실 그보다 두 아이를 돌보며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큰애가 5세, 작은애가 3세인데 아무리 바빠도 하다못해 하루에 3분이라도 놀아주려고 노력한다(웃음). 아이들을 관찰하다 보면 많은 점을 깨닫는다. 어른은 가면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가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편견도 없이 직관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작업에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존재가 아이들인 것 같다.
- 피처 에디터
- 전여울
- 포토그래퍼
- 최영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