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한 흐름이었던 케이팝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세계를 키워갔고, 이제 팝의 종주국을 뚫고 있다. 지금까지 케이팝에 대해 이렇게 할 말이 많을 줄 누가 알았을까? 바로 이 시점에 케이팝을 둘러싼 세 가지 중요한 담론을 짚는다.
‘방탄소년단 현상’ 이 시사하는 것들
미국에 머물며 케이팝의 궤적을 추적해온 지 10년이 넘었다.
소녀시대의 <데이비드 레터맨 쇼> 출연, <뉴욕 타임스>를 장식한 빅뱅의 공연, 믿을 수 없었던 ‘강남 스타일’ 열풍, 그리고 BTS의 빌보드 정상 등극. 그간 미국 현지에서 느꼈던 충격의 순간순간이 곧 케이팝 세계화의 중요한 변곡점 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묘하게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미국 언론인들, 그리고 현지 케이팝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케이팝이 죽었다’고. 정말? BTS가 상상도 못 한 성공을 거두고,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빌보드의 소셜 차트를 멜론 차트인 양 줄을 세우고 있는데? 곱씹어보면 이는 케이팝 시대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의미하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다.
이 변화의 가장 중요한 촉매제는 물론 미국발로 불어닥친 ‘방탄소년단 현상’이다.
2000년대 초반, 이미 레드오션에 진입한 한국 대중음악 산업이 해외 시장을 돌파구로 삼으면서 기획한 ‘현지화’ 전략은 일본과 동아시아에는 유효한 책략이었을지 몰라도, 궁극의 목표라 여긴 미국에서는 기대만큼의 효력을 내지 못했다.
팝의 종주국이라는 높은 콧대, 문화적 다양성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백인우월주의를 중심으로 공고하기만 한 미국 주류의 폐쇄성은 케이팝이 준비된 전략만으로는 뚫을 수 없는 무엇이었다.
미국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공을 거둔 두 가수, 싸이와 방탄소년단이 미국 시장에 일찍부터 공을 들인 SM, JYP, YG 등의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니라 케이팝 신에서는 언더독으로 여겨진 뮤지션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방탄소년단은 현지화 전략을 우회함으로써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바로 기존의 케이팝 그룹과는 전혀 다른 성격과 태도, 특히 그들만의 음악적 독창성과 이야기(내러티브)를 내세워 국가와 문화가 다른 음악 청중들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2018년 후반 현지 매체들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무려 비틀스의 미국 상륙에 비견된 방탄소년단의 역사적인 전미 투어에서, 내가 직접 만나본 미국 팬들은 ‘BTS의 핵심적인 가치는 단순히 퍼포먼스가 아닌 음악과 메시지의 진정성’이라고 입을 모았다.
팝의 종주국인 미국은 사실 모타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이돌 음악 탄생 국가이기도 하다. 동시에 펑크와 힙합의 본고장으로, 음악에서 유독 까다로운 ‘진정성’을 요구하는 시장이다.
2012년 콘서트가 미국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성공하자, 곧바로 나온 현지 매체들의 반응은 한국의 ‘공장형’ 아이돌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겉으로는 그 정교함을 칭송하는 듯했지만, 기저에는 기계적인 케이팝에 대한 비판을 깔고 있었다. 그런데 방탄소년단이 아이돌이면서 탈-아이돌적인 태도로 무장하고 등장한 것이다.
‘청춘’과 ‘꿈’을 말하고, ‘자기애’를 호소하는 그룹. 방탄소년단 이 기존의 틀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을 만들자 콧대 높은 미국 언론들마저 ‘세계 최고의 보이밴드’라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케이팝의 미래가 전략이 아닌 콘텐츠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 내 방탄소년단의 부상에 결정적 힘이 된, 케이팝 역사 상 가장 견고하고 열광적인 팬덤인 ‘아미(ARMY)’ 역시 케이팝 시대 패러다임의 전환을 함의한다.
미국 내 케이팝 팬덤은 원래 2000년대 초부터 한류 팬들이 가장 큰 축을 형성해 발전해왔다. 그러다 원더걸스와 빅뱅 등이 아이돌 그룹 전성시대를 열면서, 특정 그룹에 구애받지 않고 케이팝 전반을 지지하는 케이팝 멀티 팬덤(소위 ‘잡덕’)의 시대가 열렸다.
방탄소년단은 이 지형에도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미국 현지 팬 구성은 다른 케이팝에 비해 흑인과 라티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또한 콘서트 관객의 연령적, 인종적 다양성이 다른 케이팝 콘서트에 비해서 두드러진다.
이들이 독특한 지점은 ‘아미’로서의 아이덴티티에 유독 집착하며, 케이팝이라는 장르가 아닌 BTS의 음악에만 온전히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외친 ‘BTS-POP’이라는 선언은 케이팝 수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모순도 발생한다.
이전까지 케이팝의 해외 진출과 잇따른 성공은 분명 일정한 공식을 요구했다(케이팝 세계화의 선구자인 SM의 이수만은 그것을 ‘문화기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일정한 공식의 반작용으로 태어난, ‘반-테크놀로지’의 결과처럼 보인다.
이 결과는 언뜻 이전 케이팝 가수들의 성공과 간극이 있어 보이지만, 나는 케이팝의 성장이라는 가시적인 현상 속에 서로 다른 그 두 가지 전략과 태도가 배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한편으로 시스 템으로 상징되는 케이팝의 정교함이 해외 시장에서 유의미한 확장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도 말할 수 있다.
라틴 음악 의 득세를 반영한 슈퍼주니어의 ‘Lo Siento’의 성공, NCT 로 대표되는 맞춤형 현지 유닛이나 동남아시아 멤버를 활용한 블랙핑크와 갓세븐의 잇따른 성공 역시 케이팝의 확장을 말해준다. 미국 현장에서 느끼기에 케이팝 현상은 이제 ‘한류’를 중심 에 놓은 집단적 하위문화적 현상에서 벗어나 개별적 취향의 집합체로 그 성격이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그 흐름 속에서 방탄소년단 현상은 향후 케이팝의 미래가 결국 ‘개별화’와 ‘탈-한국’ 양상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조짐인 것 같다. 글 – 김영대(음악평론가)
해외 팬덤의 체질 변화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있어 해외 팬이란 유니콘이었다. 다들 어딘가에 있다고는 하는데 실제로 본 이는 극히 드물었기때문이다.
1970, 80년대 김연자와 조용필이 일본 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통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오던 이 유니콘 구전 설화는 21세기에 들어서며 환상 속 오아시스로 바뀌었다.
그 무렵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한 음반 시장, 불법 음원 유통, 스트리밍 시장의 무서운 성장 같은 위기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마지막 비기는 오로지 해외 시장 개척, 그뿐인 것만 같았으니까. 처음 숨통을 틔워준 건 보아의 일본 진출이었다.
‘한류’라는 단어가 드라마를 넘어 대중음악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 현직 아나운서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할 정도로 완벽한 일본어 구사와 문화 습득을 위해 애썼던 보아의 성공적인 일본 시장 진출은 ‘현지화 전략’이라는 말로 정의되었다.
현지화가 해외 진출의 필수 요소가 된 것도, 해외 진출의 헤게모니를 아이돌, 즉 케이팝 가수들이 중점적으로 쥐게 된 것도 그즈음이다. 이 시기 해외 팬의 특징은 거칠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었다.
한국 내 인기와 정비례하는 해외에서의 인기, 일본과 중국을 양 축으로 한 동아시아 사정권, 그리고 무엇보다 국내 팬들과는 사뭇 다른 해외 팬만의 독자적인 ‘덕질’, 즉 ‘팬 활동 방식’이었다.
특히 한국과 전혀 다른 문화권인 영미권 팬들의 양상이 무척 독특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하기 위해 작게는 손편지에서 크게는 고가의 명품 선물까지 불사하며 때로는 가열찬 홍보를 위해 단체 행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국내 팬에 비해, 해외 팬은 오로지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나 자신’에 집중했다.
서구권 케이팝 팬에게 가장 인기 있는 ‘덕질’ 콘텐츠는 다름 아닌 ‘케이팝 리액션 영상’과 플래시몹을 포함한 ‘케이팝 커버 댄스 영상’이었다. 새로 발매된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실시간 반응을 영상에 담을 때도, 아이돌의 춤과 의상을 따라 하는 것에 심취할 때도 모든 포커스는 케이 팝을 사랑하는 ‘나 자신’에 맞춰졌다. 이러한 일종의 법칙이 일상이 되어갈 즈음 싸이의 ‘강남스타일’(2012)이 등장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노래가 되어버린 이 곡은 한국 대중음악계 전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마침 타이밍도 절묘했다.
해외 진출의 정석 취급을 받던 현지화 전략이 슬슬 정체기에 들어선 상황이었고, 싸이와 말춤을 세계에 전파한 온라인 영상 플랫폼 ‘유튜브’는 음악은 물론 비주얼과 안무, 콘셉트와 서사까지 아우르는 케이팝의 종합 엔터테인먼트적 성격과 꼭 맞아떨어졌다.
오른손에 스마트폰을, 왼손에 노트북을 들고 태어났다 해도 좋은 지구촌 청춘의 통일된 일상도 유효했다. 해외 팬들의 체질 변화가 시작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곳곳에서 변화의 신호가 감지되었지만 역시 가장 큰 파도는 방탄소년단이 이끌었다.
빌보드 1위 그룹의 위엄은 물론 UN 총회 연설, 세계를 대상으로 한 각종 음악상 수상 소식 등 연일 화제를 몰고 다닌 이들의 해외 팬덤은 지금까지 해외 팬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방탄소년단의 팬클럽 ‘아미(ARMY)’가 보여준 각종 집단 행동 방식은 서브컬처 마니아들의 성향을 다수 흡수했던 이전 세대의 해외 팬과는 확실한 차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이러한 변화상의 대부분이 국내 팬덤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음반 판매량에 비해 낮은 방송 횟수를 만회하기 위해 미국 아미들이 힘을 합쳐 50개 주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신청곡과 사연을 보낸 ‘@BTSx50States’ 프로젝트는 음원 사이트 순위를 올리기 위해 권장 스트리밍 리스트를 공유하는 한국의 ‘음원 총공’ 운동과 흡사한 개념이다.
태국 아미인 ‘BTS 타일랜드’와 ‘캔디클로버’가 방탄소년단 데뷔 5주년을 기념해 총 20만 cc의 혈액을 모아 기부한 일 역시 기부와 선행으로 자신들의 애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국내 팬덤의 변화와 정확히 일치하는 흐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는 해당 가수를 향한 애정과 그들을 지지하는 힘을 한 점에 모을 수 있는 충성도 높은 다국적 팬덤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는 줄곧 경계에 머무른 케이팝이 서서히 주류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증거이자, 그에 따라 이전에 비해 수적, 양적으로 성장한 케이팝 해외 팬덤이 자연스레 체질을 바꾸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의 팬덤은 곧 하나의 작은 국가다. 이제 세계로 날개를 펼친 이 초월 국가는 인종, 국적, 성별, 연령 등 그 어떤 것으로도 한 국가의 개개인을 멋대로 규정하거나 불합리한 방식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각종 종교가 인류에게 제시하는 이상향만큼이나 매력적인 이 가상의 유토피아는 아마도 한동안 팽창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끝에 천국과 지옥,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적어도 지금 팬들의 눈앞에 놓인 건 커다란 강철 무지개뿐이다.
케이팝이라는 국가 속, 모든 것을 초월한 ‘우리’는 하나다. 글 – 김윤하(음악 칼럼니스트)
국가주의와 케이팝의 생존 문제
갑작스럽고 불길하지만 한번 가정해보자. 어느 날 세계 시장이 케이팝을 외면한다면? 사실 이를 원한다는 국내 팬들도 있다. V 라이브 도중 영어로 말해달라며 “Oppa, Eng plz”라고 끼어드는 외국 팬이 밉다거나, 내 아이돌을 한국에서 더 자주 보고 싶다는 이유 등등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해외 시장 없이는 케이팝이 지금처럼 지속되기 어려워 보인다. 보이 그룹은 국내에서 인지도가 미미하더라도 데뷔 후 일단 외국을 도는 것이 일종의 사업 모델처럼 됐다.
대중음악의 수입 구조는 CD의 시대가 간 이후 음반 판매가 아닌 공연이 확고한 중심으로 자리 잡았는데, 한국의 내수 시장은 공연보다 미디어 중심이라 수익성이 낮다.
음원 내수 시장은 늘 사재기 논란에 휘청거릴 정도로 자그마할뿐더러 아이돌은 그 안에서도 작은 규모다. TV 음악 방송이야 아이돌 천지처럼 보이겠지만, 2018년 가온 연간 차트의 10위권 안에 아이돌은 고작 세 팀 있었다.
케이팝 아이돌은 자본의 예술이다. 저변도, 수익성도 낮아졌을 때는 콘텐츠의 질 역시 견디기 힘든 수준일 공산이 크다.
오늘의 케이팝은 2000년도 전후 발생한 한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일본을 생각하면 케이팝이 보다 드라마틱하고 적극적으로 주저앉아버릴지도 모른다는 기우가 들기도 한다.
사드 갈등을 계기로 등장한 중국의 한한령이나 일본의 혐한 정서 등이 그 예다. 욱일기나 위안부 문제가 지금까지 잊을 만하면 되살아났듯, 케이팝도 앞으로 언제든 정치적, 정서적 기류에 따라 냉랭한 바람을 얻어맞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런 현상은 대체로 한류의 인기가 너무 커질 때 한 번씩 불거진다고도 한다. 실제로 한한령 직전까지 중국 연예계에서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을 통째로 사가는 일도 있었고, 케이팝에게서 배우고자 한국의 실용음악학원 지점을 중국에 설립하려 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트와이스와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치솟자 한동안 잠잠하던 혐한 기류가 되살아나기도 하고,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인기가 지속되기도 한다.
정서적인 공통점도 많은 나라들이라 케이팝에 더 쉽게, 더 깊이 빠져드는 사람이 많아서 생기는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중국과 일본은 케이팝에 중요한 시장이다. 양국 다 한국보다 인구 규모도 크고 소비에도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데뷔한 아이돌이 어느새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중국 또는 일본에 건너가 매우 잘 활동하고 있다는, 흡사 도시 전설 같은 사례도 제법 있다. 한류가 처음 생겨난 때로부터 20년간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 한국은 중국과 일본 시장을 공략하는 노하우도 꽤 쌓았다. 최악의 경우 활동할 길이 아예 막히기도 했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무엇보다 이제는 드넓은 세계 시장으로 나간 케이팝이 반드시 동아시아를 잡아야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작 케이팝의 문제는 내면적인 곳에 있다.
단편적인 예로, 최근 방탄소년단 멤버가 입은 광복 기념 티셔츠 속 원폭 사진 구설수다. 일본에서는 극단적인 저주나 테러 위협이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악화되었고, 소속사 측은 원폭피해자협회를 찾아가 사과하기도 했다. 전범행위에 대한 일본의 반성 부족과 원폭의 반인류성 사이에서 최선의 대응을 한 셈이다.
그러나 당시 국내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는 원폭 사진으로 광복을 기념하는 것이 정당하며 이를 해낸 방탄소년단이 국가의 영웅이라는 식의 반응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런 반응 앞에서, 지금 케이팝이 세계에서 주목받는 이유를 곱씹어보게 된다.
케이팝이 인기를 얻은 이유는 일차적으로 아티스트들의 기량과 콘텐츠가 뛰어나기 때문이지만, 외국 문화에 보수적인 미국 시장까지 케이팝을 향해 문이 열리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작년 9월 방탄소년단의 UN 연설 때, 이들은 단순히 떠오르는 가수가 아니었다. 동아시아에서 출발해 소수자 그룹의 열정적 지지를 바탕으로 꿈을 이룬 청년들, 즉 밀레니얼 세대의 절망에 대한 해답이자 다양성의 표상으로서 제시된 인물이 방탄소 년단이었다.
지금 미국이 아시아인을 주목하고 케이팝에 관심을 갖는 건 미국의 입장에서 아시아가 다양성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이 구상하는 ‘다양성이 실현된 미래’에, 지금껏 없었던 케이팝의 자리가 형성된 것이다. ‘국가주의’는 케이팝의 가장 치명적인 함정이다.
당신이 미국에 사는 소수자 또는 진보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지금껏 미국과 대중음악 산업이 외면해온 한국의 아티스트들이 각광받는 것을 짜릿한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다.
한국 아티스트가 입고 나온 티셔츠로 인해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서 비판 의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고한 시민들이 원폭으로 고통받은 것을 두고 ‘정의의 실현’이라고 환호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의할 수 있을까? 반인류적인 수단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BTS의 지원군 중 일부라고 생각하면,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케이팝을 바라볼 수 있나? 그때도 당신은 다양성의 이름으로 케이팝을 지지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것이다.
‘다양성의 아이콘’인 케이팝을 낳은 우리는 다양성의 세계에 대한 준비가 덜돼 있다는 것. 적지 않은 한국 대중은 틈만 나면 외국 출신 아이돌이나 외국 팬을 경멸하고, 아이돌이 다문화 가정 출신이면 팬들조차 이를 철저히 함구한다.
음악 시장의 다양성을 논할 때마저 드넓은 제국 곳곳의 식물을 모아 수도에 식물원을 세우는 황제의 마음으로 시장의 통제를 요구한다. 이런 것은 조심하고 눈치 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케이팝 아티스트들이야 조심하면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는 게 업’이지만, 대중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를 ‘정복’하고 ‘점령’했다고 말하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케이팝’에 취한 이들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케이팝의 생존은, ‘K’를 떼어내는 데 달렸다. 글 – 미묘(<아이돌로지> 편집장)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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