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이 새로운 계절이 도래했음을 알린다. 우아한 벨벳이 드리워진 뉴욕을 시작으로 만화적 상상력을 더한 판타지, 플라워 테라피로 이어진 런던, 파워풀한 레드와 글리터가 장악한 밀란, 맥시멀리즘의 선봉자인 파리까지. 4대 도시의 2017 F/W 핵심 트렌드를 추렸다.
Milan
글리터 마니아
최근 몇 년간 시즌을 불문하고 트렌드에 오른 ‘글리터’ 룩. 밀란 패션위크를 여는 쇼, 구찌부터 이 반짝이 트렌드가 여전함을 예상할 수 있었다. 오리엔탈리즘 코드가 가득한 의상 1 백20여 벌 가운데 크리스털 스톤 장식 보디슈트와 마스크의 등장은 미켈레의 판타지와 이상향을 보여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치였으니까. 마르니에서 첫 쇼를 선보인 프란체스코 로소도 거울 조각을 이어 붙인 듯한 비즈 드레스를 피날레 룩으로 선택했다. 에밀리오 푸치와 베르사체는 시퀸 이브닝드레스를, 보테가 베네타와 질샌더, 밀란의 신성 안나 키키는 광택이 도는 라메 소재로 화려한 무드를 더했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옷과 액세서리뿐 아니라 신발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MSGM의 은색 프린지 앵클부츠와 마르코 드 빈센초의 크리스털 롱부츠를 보면 이해하기 쉬울 듯. 그다음 바통을 받은 도시, 파리에서도 스팽글과 글리터, 크리스털을 이어 붙인 반짝이 신발은 이어졌다.
펀 &영
재미와 즐거움, 톡톡 튀는 개성이 없다면 좀이 쑤시는 디자이너들은 쇼에 특별한 볼거리와 에너지를 주입하는 존재. 위트를 미덕으로 삼는 밀란의 잔뼈 굵은 하우스는 그게 현대적이거나 세련된 일상복과 거리가 멀더라도 자신의 길을 간다. 소포 박스와 자전거 바퀴는 모자가 되고, 골판지는 부츠와 벨트가 되며, 뽁뽁이는 드레스가 되는 것은 모스키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유쾌한 판타지. 돌체 &가바나는 호랑이와 백곰 모양의 모자와 신발, 가방으로 재미를 더했으며, 에밀리오 푸치는 손끝까지 내려오는 프린지를 모자 아래 길게 붙여 시야를 가릴 정도로 아찔한 신을 완성했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알베르타 페레티의 빨간 망토, 엉뚱한 헤어 장식과 패치로 신개념 너드 룩을 제안한 스텔라장, 큐피드의 화살과 꽃이 든 바구니를 들고 나온 구찌, 우스꽝스러운 뺑뺑이 선글라스를 쓴 마르니 등등.
빈티지 모피
동물 보호와 환경 이슈에 밀려 그간 모피의 공급과 소비가 제한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 와중에도 모피를 만드는 소수의 하우스는 한동안 더 거대하고 풍성하게, 화려함의 정점을 찍는 스테이트먼트 퍼를 지속적으로 내놓았다. 이번 시즌에는 압도적인 볼륨과 럭셔리한 무드를 지양하고 1970년대 레트로 무드를 머금은 모피 아우터의 등장이 두드러진다. 라면처럼 곱슬거리는 몽골리안 램이나 아프간하운드의 긴 털을 연상시키는 고트, 가장 대중적인 모피인 여우털의 활약은 미미하고, 짧게 깎은 밍크와 양털이 주로 활약했는데, 멀티컬러나 무늬로 빈티지한 멋을 강조한다. 모피 하우스 펜디를 비롯해 마르니와 마르코 드 빈센초, 블루마린의 쇼를 본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듯.
파워 레드
4대 도시 어디든 이번 시즌 키 컬러는 ‘레드’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을 없을 것이다. 다홍색부터 진한 빨강까지, 레드가 보여줄 수 있는 광대한 스펙트럼이 시선을 끄는데, 밀란은 채도가 높은 토마토 레드가 강세를 보였다. 특히 붉은색은 신발이나 가방, 아우터 등 포인트 아이템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오랜 편견을 깨줄 ‘올 레드’ 룩이 눈에 띈다. 붉은색 니트 톱, 붉은색 팬츠, 붉은색 아우터, 붉은색 신발, 붉은색 가방까지, 입고 드는 모든 것을 붉은색으로 통일한 막스마라와 펜디, 토즈, 프란체스코 스코냐밀리오가 그 예. 심지어 펜디는 ‘풀’ 레드 룩에 붉은색 귀고리를 더했지만, 소재와 질감에 차이를 둔 ‘레드 레이어링’ 기법은 과하다기보다는 현대적이고 파워풀한 에너지를 전한다. 한편 볼륨 톱과 울 팬츠로 여유로운 실루엣을 완성한 질샌더의 룩은 일상에서 즐기는 레드 룩의 모범처럼 보였다.
레트로 그래픽
밀란의 프린트를 지배하는 두 가지 노선은 오리엔탈리즘을 반영한 히피 무드와 기하학적인 무늬로 이뤄진 그래픽 터치로 나뉜다. 그중 반복적인 무늬로 시각적인 자극을 선사하는 그래픽 패턴의 경우 미래적이기보다 복고풍으로 해석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미쏘니와 프라다에서는 톤다운된 멀티컬러와 니트, 울과 같은 소재와 만나 강렬한 패턴을 부드럽게 중화시킨 점이 포착됐다. MSGM은 허리춤의 꽃무늬 패브릭과 머리에 스카프를 감싸는 식으로 빈티지한 무드를 강조했다. 체크 패턴 역시 이런 흐름과 맞물려 전개됐는데, 아퀼라노 리몬디와 엠포리오 아르마니의 검정 깅엄 체크 코트와 드레스, 파우스토 푸글리시의 규칙적인 피아노 타일 패턴 재킷, 그러데이션 기법을 더한 보테가 베네타의 타탄체크 코트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Paris
우먼 파워
미니멀리즘과 놈코어 트렌드의 대명사 ‘젠틀 우먼’이 다시 돌아왔다. 파리의 디자이너들은 이번 시즌 오피스 룩, 매니시 룩, 앤드로지너스 등으로 묘사되는 모던한 중성성이 특징인 여성상의 종결판을 보여주는 파워풀한 행보를 보였다. 셀린의 피비 파일로,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 스텔라 매카트니 등이 무게감 있는 슈트 룩으로 트렌드를 이끈 장본인이다. 이 디자이너들이 그려낸 파워풀한 슈트 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묵직함 가운데 여성만이 표현할 수 있는 특유의 가녀리면서도 유연한 감성을 불어넣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풍성한 실루엣과 기존의 슈트와 차별화된 박시한 볼륨감이 바로 그 유연함 뒤에 숨겨진 열쇠다. 피비 파일로는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테일러드 재킷으로 레트로적이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슈트를 선보였고, 드리스 반 노튼은 걸을 때마다 찰랑이는 듯한 폭 넓은 팬츠에 로퍼를 매치해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여성의 모습을 보여줬다. 뎀나는 해체적이고 실험적인 터치를 곁들여 보다 건축적인 실루엣을 만들어낸 것이 특징.
트라이벌 맥시멀리즘
알렉산더 매퀸 쇼를 통해 사라 버튼이 전하고자 한 것은? 콘월 지방의 대자연 및 주술과 같은 신비로운 고대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원시적인 아름다움. 한땀 한땀의 노력이 엿보이는 스티치, 원색적인 태피스트리 패브릭의 믹스 매치, 러프하게 늘어진 프린지, 장인 정신이 느껴지는 장신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매혹적인 카오스를 연출했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존 갈리아노 역시 맥시멀리즘의 대가답게 화려한 색채와 다양한 무늬가 어우러진 미국 전통 뜨개질 기법의 룩으로 노스탤지어를 자극했다. 그 토속적인 이질감에 대한 신비한 경외와 손맛이 깃든 정교한 장식의 힘으로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은 룩들.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문화의 다양성이 빚어낸 풍성한 아름다움이 올가을의 풍경을 신선하게 그려냈다.
매혹적인 하이-쿠튀르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1백 주년을 기념해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받은 쿠튀르 드레스가 런웨이에 등장했다. 인상적인 건 극적인 볼가운을 오늘날 스트리트를 수놓고 있는 오버사이즈 백과 매치한 뎀나 바잘리아의 기지! 니나 리치와 소니아 리키엘, 알렉산더 매퀸, 몽클레르 감므 루즈의 쇼에서도 모델의 걸음마다 살랑거리는 섬세한 깃털과 반짝이는 스톤 장식 등으로 장식한 로맨틱한 쿠튀르 터치를 엿볼 수 있었는데, 중요한 건 센슈얼하거나 강인하거나 아방가르드하거나 혹은 스포티한 모티프를 더했다는 것. 즉, 장인 정신을 근간으로 한 파리 쿠튀르 하우스의 내공을 보여주는 동시에 단순히 여리고 고운 여자가 아닌 하이패션의 궁극적인 흥미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자신감 넘치는 고수들을 위한 제안이었다.
매혹적인 데님
영원한 클래식, 데님. 80년대 브룩 실즈가 등장한 진 광고로 기억되는 그 청초하고 담백한 데님 열풍이 신선하게 부활했다. 뉴욕의 라프 시몬스를 필두로 파리의 주요 쇼에 감초처럼 등장한 데님의 고공 행진은 지난 80~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안겨주는 동시에 스트리트의 유스(Youth) 트렌드를 대변했다. 쇼 전체를 휘감은 매혹적인 블루 팔레트 안에서 청청 패션을 베레모와 함께 연출해 프렌치 걸의 사랑스러움을 어필한 디올, 매일매일의 일상이 명명하는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담아낸 스텔라 매카트니, 반짝이는 크리스털을 장식한 데님 진으로 글램한 디스코 무드를 연출한 이자벨 마랑, 나아가 스포티한 아방가르드함을 곁들여 데님을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한 오프 화이트(리바이스와 협업한 채)와 코셰에 이르기까지. 데님을 바라보는 각자의 흥미로운 시선은 일상의 모든 순간에 다채롭게 활용할 만했다.
비범한 퍼
F/W 시즌이면 으레 등장하는 베이식한 퍼를 떠올렸다면 파리 컬렉션 런웨이에서 펼쳐진 퍼의 전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에코 퍼를 컬렉션의 주제로 정한 미우미우는 포근한 인형이 연상될 정도로 풍성한 퍼 의상과 액세서리로 가득 채웠다. 체크무늬와 과장된 칼라 장식, 화려한 주얼 벨트까지 더한 미우미우의 퍼는 입체적이고 귀여운 매력도 지녔지만, 퍼 특유의 와일드한 멋을 강조하기엔 충분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군중을 압도하는 쇼를 펼친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 역시 여전사다운 면모를 지닌 그의 뮤즈 세계를 펼치는 듯 모던하고 웨어러블한 의상에 거친 입체감이 느껴지는 패치워크 퍼 코트를 연출해 원초적이면서도 야생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나섰다. 하이더 애커만, 니나 리치, 드리스 반 노튼, 랑방, 로샤스 등에서도 풍성한 퍼 코트나 소매, 스커트 자락에 퍼를 구름처럼 장식한 의상이 눈에 띄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퍼 의상을 소개한 쇼는 바로 발렌티노였다. 마치 아트 작품을 보는 듯한 컬러 조합과 추상적인 그림이 그려진 피에르파올로의 퍼 코트는 와일드함과 모던함이 혼재된,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 에디터
- 이예진· 박연경· 백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