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로, 갈란트, 그리고 에릭남. 우연에서 시작되어 필연으로 거듭난 세 남자의 컬래버레이션.
세 남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동서양을 가로지르고 장르를 넘나드는, 예측하기 어려운 의외의 조합이다. 저마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를 알게 된 갈란트, 타블로, 에릭남은 음악적인 감수성과 태도를 공유하면서 하나의 곡을 만들어가고 있다. 제목은 ‘Cave Me In’. 의역을 조금 보태자면 ‘나를 함몰시키고 내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올해 코첼라 페스티벌 무대에 에픽하이가 서게 되어 현장에서 처음 갈란트를 만났어요. 물론 갈란트라는 아티스트가 어떤 음악을 하는지는 전부터 알고 있었고요. 그때 (미국에서 프리랜서로 매니지먼트 일을 하고 있는) 에릭의 친동생인 에디도 놀러 왔어요. 저는 에릭이 만든 곡 ‘못 참겠어’에 가사를 쓰기도 했고, 친하게 지내 오던 사이죠.”(타블로) “에픽하이 멤버들과 함께 저희 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한 적도 있어요. 제가 지난 8월 ‘서울소울페스티벌’ 출연차 한국에 왔을 땐 하이그라운드 사무실에서 보쌈에 소주를 마셨고요. 셋이 작업한지는 6개월 이상 됐는데, 서로 스케줄이 바쁘다 보니 에릭을 직접 만난 건 3일 전 LA에서였죠.”(갈란트) “아침을 먹으면서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갈란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 친구 왜 이렇게 우울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 보고 대화해보니 재미있는 친구더라고요. 오래 알아온 사이처럼 편했어요. 제 동생 에디가 워낙 친화력이 좋아 갈란트나 갈란트의 소속사와도 친하다 보니 훌륭한 다리 역할을 해줬죠. 타블로 선배님과 처음 함께 작업하게 됐을 땐 너무 좋아하는 분이라서 긴장하기도 했지만, 친형처럼 잘 챙겨주시더라고요.”(에릭남)
하지만 정작 이번 작업의 단초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셋 중 아무도 없었다. 갈란트는 ‘그냥(Just) 서로를 알게 됐다’, 타블로는 모든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에릭남은 ‘마치 연주자들이 무대에서 재밍(Jammin)하듯 작업하게 됐다’고 회상할 뿐이다. 어쩌면 그저 마음이 맞아 작업하게 된 아티스트들에게 굳이 그 출발을 묻는다는 것부터가 부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트랙은 밴쿠버 출신의 프로듀서 로파일(Lophile)이 작업했다. 그 트랙을 바탕으로 세 사람이 각자의 조각을 만들었고, 그 뒤부터 몇 개월간 곡은 바다를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이를테면 갈란트가 한 파트를 불러서 보내면 타블로가 자신의 파트를 얹으면서 몇 가지 버전을 만들어보고, 타블로와 에릭남이 새벽에 만나 함께 작업한 파일을 다시 갈란트에게 보내는 식이었다. 활동 무대가 다르다 보니 작업 기간은 길어졌지만, 그만큼 여유 있는 마음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회사와 상관없이 저희끼리 시작한 작업이라 오히려 조율할 것이 줄어드는 부분도 있어요. 데드라인도 없고, 비즈니스 차원에서 내가 돋보이겠다고 애쓰지도 않고요. 아티스트끼리 ‘음악적으로 이 정도가 딱 좋다’ 하면 되는 거니까. 올드하게 말하면 ‘음악을 하고 싶은 세 남자가 부르는 노래’예요.” (타블로) “90년대 R&B 느낌의 편안한 곡이에요. 세 사람의 목소리가 어떻게 어울려서 나올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작했는데, 노래를 들어본 분들 대부분이 다시 또 듣고 싶어진다고 하시더라고요.”(에릭남)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시차를 맞춰가며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이 꽤 복잡했음에도 갈등이나 잡음은 없었다. 타블로는 그 이유를 ‘셋이 정말 잘 맞아서’라고 축약한다. “원래 두 명 이상의 뮤지션이 컬래버레이션을 하게 되면 구성과 비중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저희 셋은 모두 ‘내 파트가 적더라도 노래의 완성도가 높길 원한다’는 태도를 갖고 있어요. 실제로 저도 원래 제 랩 파트의 몇 몇 부분을 빼버렸고요. 이런 분위기의 노래라면 사람들이 너무 긴 랩보다 멜로디를 더 기대할 것 같아서요.”
사실 타블로에게는 이 외에도 준비 중인 협업이 여럿이다. 에픽하이와 일본 밴드인 세카이노 오와리, 그리고 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도 뮤지션과의 프로젝트 등이 그 예다. 얼마 전에는 라디오 DJ 시절 코너를 위해 쓴 짧은 글을 다듬어 자신의 두 번째 책인 <블로노트>를 출간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손이 열 개여도 모자랄 만큼 다양한 일을 부지런히 핸들링하고 있는 그를 지켜본 갈란트는 ‘마치 타블로가 저 멀리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가운데, 1000개의 크고 작은 일이 동시에 돌아가고 있는 듯’ 하다고 표현했다. 타블로 스스로가 느끼는 바는 조금 다르다. “만약 제가 제빵사라고 한다면, 소시지빵, 크림빵, 식빵 등을 굽는다고 해서 제가 그 빵의 종류만큼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책을 내고, 다른 뮤지션의 뮤직비디오에 관해 상의를 해주는 것이 크게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부 음악 하는 사람, 창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하는 일들이죠.” 데뷔 14년 차 뮤지션인 그는 이제 ‘음악 하는 것 그 자체’만이 의미 있다고 말한다. 부지런히 음원을 발매하고, 높은 차트를 기록하고, 좋은 평을 듣고, 방송 활동을 하기보다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과 즐기며 작업하는 것 말이다. “에픽하이 멤버들은 그냥 음악 작업하는 것,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팀이라는 게, 그런 것 같아요. 어떤 밴드의 드러머가 있다고 할 때, 그가 그 밴드의 멤버인 데는 실력과는 별개의 이유가 있잖아요. 에픽하이에서도, 저나 미쓰라, 투컷보다 각자의 영역에서 더 뛰어난 사람이 많을 테지만 상관없어요. 우리 셋이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수없이 한계에 부딪치면서도 팀으로서 극복하려고 함께 노력하는 거요. 언젠가 자신을 돌아봤을 때 최선을 다했고 행복했으면 된 거죠.” 하지만 정작 에픽하이의 고민은 열심히 작업한 결과물을 공개하는 것이 예전처럼 내키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만족스러운 작업물도 ‘발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워지고,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다시 몰두하게 된다는 것이다. 팬 혹은 대중에게 음악을 들려주지 않고 뮤지션으로 남을 수 있을까. 혹시 더 이상 ‘평가’받고 싶지 않은 것일까. 타블로를 비롯한 에픽하이 멤버들은 그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아마 허무함 때문인 듯해요. 예전처럼 음악 방송에 출연한다든지 하는 활동을 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앨범 나오기 직전이 가장 활발하게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트랙을 마무리하고 제목 붙이고 수정하고 아트워크를 구상하는, 가장 흥미진진한 과정. 그러다 앨범이 딱 나오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잖아요. 마치 친구들과 함께 학교 생활을 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졸업하기 싫은 느낌? (밴드 넬의) 종완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2014년 앨범 <신발장> 이후 에픽하이의 이름으로 발표된 음원은 드라마 OST로 삽입된 ‘내 마음 들리나요 (Feat. 이하이)’가 전부다. ‘그토록 즐겁게 작업한’ 결과물을 자신들만 누리지 않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들려줄 수 있도록 재정비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던 그가 웃으며 덧붙인다. “이런 협업의 장점 중 하나는 내가 시간을 끌어도 다른 누군가가 알아서 잘 발표해줄 거라는 데 있죠.”
그도 그럴 것이,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개될 세 사람의 협업 ‘Cave Me In’은 그에 앞서 이미 에릭남에 의해 해외 유수의 아티스트들로부터 ‘중간 점검’을 받았다. 최근 한국과 미국, 해외 곳곳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에릭남이 퀸시 존스와 팀버랜드 등에게 작업 중인 노래를 들려줬고, 대부분이 긍정적인 피드백과 기대감을 보였다는 것이다. “전공이 ‘국제 관계’라 우리 셋 중에서 ‘국제적인 인맥’을 담당하고 있다” 며 놀리는 갈란트와 타블로의 말에 키득거리던 에릭남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미국에서 업계 사람들이 모여 식사하고 술 마시는, 떠들썩한 파티 같은 행사에 참석해 노래할 일이 있었어요. 무대 앞 테이블에 퀸시 존스가 앉아 있었는데, 제가 노래를 시작하니까 대화를 멈추고 뚫어져라 바라보더라고요. 노래를 마치고 내려오니 그가 ‘너에게는 스페셜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해줬어요. 너무 감사하고 뿌듯했어요. 그 인연으로 며칠 전 퀸시 존스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죠. ‘Cave Me In’을 들려줬더니 좋아하더라고요.” 에릭남 역시 내년 초를 목표로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여전히 음악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찾고 있는 그는 더는 ‘팝스럽다’는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설령 ‘결과가 안 좋으면 또 어때?’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가수로서,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현실적인 일정상 갈란트가 이번 인터뷰에 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날, 자신의 첫 단독 내한 공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 당일, 광장동 예스24 라이브홀은 좌석은 물론이고 스탠딩 구역의 맨 뒤까지 빈틈없이 관객이 들어찼다. 공연 기획사의 추산에 따르면 이날 관객은 총 1천7백여 명. 지난 4월 발매된 정규 앨범 한 장이 디스코그래피의 전부였지만 그는 푸 파이터스의 ‘Learn to Fly’ 커버를 비롯한 16곡으로 공연장을 꽉 채웠다. ‘Weight in Gold’를 포함해 16곡이 수록된 데뷔 앨범 <Ology>는 매체의 평단과 관객을 사로잡으면서 그를 ‘피처링 섭외 1순위’의 힙한 뮤지션으로 만들어줬을 만큼 훌륭한 음반이었다. 하지만 가성 위주의 소름 끼치는 가창력은 라이브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관객들은 갈란트의 그 섬세하고 어려운 노래들을 어엿하게 따라 불렀다. “어제 공연은 정말 흥분됐어요. 제 첫 번째 솔로 투어잖아요. 다른 아티스트와 함께하거나 제가 서포트하는 입장이 아니니까, 절 보러 공연에 오는 모든 사람이 제 베스트 프렌드인 셈이에요. ‘서울소울페스티벌’도 재미있었고 에너지 넘쳤지만, 어제는 그 느낌이 전체적으로 훨씬 증폭됐어요.” 지미 팔론의 ‘The Tonight Show’에서 정신이 나간 야수처럼 폭발하던 그의 에너지는 70여분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무대 끝에서 끝으로 날 듯이 뛰어다녔고, 간주와 전주, 심지어 물을 마실 때도 그의 몸은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무대 위의 소파에 뛰어올랐으며, 물을 마시다 식물에게 물을 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관객에게 등을 돌린 채 은밀하게 선글라스를 쓰고서 고개를 돌릴 때의 능청스러운 표정이란! “원래 공연에서 별로 긴장하거나 떨지 않아요. 무대에 오르면 그저 자유로워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죠. 제게 무대에서 자신을 표현한다는 건 체육관에서 뛰어다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에너지를 분출할 때 살아 있다고 느껴요. 무대에 늘 소파와 화분을 놓는 것은 사람들에게 좀 더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예요. 제가 집에 혼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외로우면서도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도와주거든요.” 글로벌한 컬래버레이션이 낯설지 않은 시대, ‘함께 작업하는 뮤지션이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살고 있는 것뿐’이라던 타블로의 말이 맞다. 케이팝을 즐겨 듣고 일본어를 공부할 정도로 아시아 문화를 존중하는 갈란트에게도 타블로, 에릭남과의 작업은 동양과 서양, 국적과 인종을 넘어 ‘친하고 잘 맞는 형들과의 신나는 작업’에 가까웠다. 그는 세 사람이 한 무대에 서는 자리가 조만간 꼭 현실화되길 바란다는 설렘을 내비쳤다.
서울, LA, 샌프란시스코, 덴버 등 한국과 미국 곳곳에서 세 사람의 손을 번갈아 거친 ‘Cave Me Iin’은 이제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금쯤 마이애미에 있을 갈란트가 마지막 터치를 더하고 나면, 최종적으로 로파일이 음원을 마무리할 것이다. 아직 어떤 회사에서 어떤 경로로 발매될지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회사가 세 군데인데, 어디서든 발매만 하면 되지, 뭐’라는 식이다. 최소한의 목표는 최대한 올해 안에, 말하자면 12월 중에는 음원을 발표하자는 것 정도. 인터뷰 마지막까지 이들 세 명과의 인터뷰는 한 명이 다른 두 명에게 그 공로를 돌리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서로가 어떤 장점을 갖고 있는 뮤지션인지를 파악하고 존중하는 작업이었어요.”(에릭남) “이 노래에 ‘내가 꼭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이 곡에 ‘낄 수’ 있어서 신기하고 고마워요.”(타블로) 그리고 마지막 컷을 촬영하러 일어서면서 갈란트가 덧붙였다. “타블로, 에릭과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번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영광이에요.”
- 포토그래퍼
- JANG DUK HWA
- 글
- 강경민(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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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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