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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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 뮤지엄 탑동시네마에서는 제주의 바다가, 동문모텔II에서는 구시가지 사이로 흐르는 산지천이 내려다보인다. 거대한 화이트 큐브를 우뚝 세우는 대신 지역 커뮤니티 속에 오래 존재해온 건물들을 살려서, 제주의 자연과 어울리는 방식으로 덩치를 줄여 스며든 미술관이다. 4개의 미술관으로 뼈대를 세운 아라리오 제주 프로젝트의 내용을 채우는 건, 김창일 회장과 젊은 아티스트들이다.

6개월 만에 찾아간 제주 구시가지, 삼도2동 해변 공연장 일대는 한결 활력에 차 있었다. 한때 번화가였지만 유행이 옮아가면서 지역 주민 이나 관광객의 발길이 웬만해진 이 동네에 다시 젊은 생명력을 불러온 것은 그사이 문을 연 아라리오 뮤지엄이다. “기사님, 탑동시네마 가주세요. 예전 영화관 건물인데 외벽이 빨간색이에요.” “아, 빨간 미술관?” 제주 택시 기사도 지난 몇 달 사이에 이미 새로운 뮤지엄과 친숙해진 모양이었다. 지난해 10월 1일, 아라리오는 제주 시내 영화관과 모텔 등 더는 사용하지 않는 상업용 건물들을 인수, 리모델링한 전시 공간 세 군데의 문을 한꺼번에 열었다. 도보 10분 거리 안에 있는 탑동시네마, 탑동바이크샵, 동문모텔 I이 바로 그곳들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려면 맛있는 음식이 있어야 한다’는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의 철학대로 미술관에서 운영하거나 제휴한 이탤리언 레스토랑과 빵집, 돈가스 가게와 수제 맥주 전문점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아티스트이자 갤러리 오너, 컬렉터이기 전에 노련한 사업가인 그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앞선 세 군데와 반년의 시차를 두고, 아라리오 제주를 완성하는 네 번째 미술관이 4월 초 문을 열었다.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I에서 엎어지면 무릎 닿는 거리에 있는 동문모텔 II는, 마찬가지로 버려진 숙박 시설을 인수해 손보고 새로 단장한 공간이다. 미술관 네 군데 중 절반, 탑동시네마와 동문모텔에서는 아라리오의 소장 미술품을 상설 전시하며, 기획 전시를 열게 되는 나머지 절반 가운데 탑동 바이크샵은 비교적 잘 알려진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개인전 또는 그룹전에 할애되는 공간이다. 개관전으로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였던 김구림의 전시가 열렸고, 이어 두 번째 전시
로는 권오상의 연대별 대표 사진 조각을 아울러 볼 수 있는 개인전 <구심점들>이 열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동문모텔 II는 젊고 새로운 아티스트들을 소개하는 기획 전시를 앞으로 선보이게 된다. 4개의 뮤지엄이 모두 문을 열면서, 제주도 아라리오 미술관의 포트폴리오가 완성된 셈이다.

김창일 회장은 제주의 고유한 지형을 살린 지역 개발 프로그램인 올레길 모델에서 제주 아라리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한다. “올레길이 나에게 자신감을 줬어요. 사람들이 제주에 올 때 늘 똑같은 코스로 가지 않고 골라서 걷듯이, 미술관도한 덩어리로 뭉치지 말고 나누자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올레길을 따라 작은 레스토랑, 카페, 공예점이 생기고 사람들이 이런 장소들을 찾아 다니듯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게 말이죠.” 미술 컬렉터로 세계 곳곳을 여행한 김 회장은 제주도가 지정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홍콩이나 싱가포르의 강점을 겨뤄 경쟁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대신 올레길 이후 도보 코스를 따라 생겨나는 게스트하우스나 펜션, 카페같이 작고 조그만 장소들에서 제주도의 희망을 본다. 눈에 띄는 중심에 우뚝 선 무언가를 개발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지도를 보고 일부러 찾아갈 수 있는 곳, 동네의 개성을 살리는 공간들이 늘어나면서 지역이 활성화되는 방식이다. 그렇게 제주 아라리오도 큰 덩어리가 아니라 기존 건물의 규모에 맞게 쓰임새를 분리해 네 개로 나누고, 각기 미술관에 성격을 부여했다. 6개월 전의 제주 투어와 그전의 서울 공간 미술관에서도 도슨트처럼 안내했던 김창일 회장은 마치 미술관 외벽처럼 채도가 높은 빨간 재킷을 입고 있었다.

4월 초 문을 연 동문모텔 II의 개관 전시인 <공명하는 삼각형>은 이 미술관이 지향하는 목표를 야무지게 선언하는 듯 하다. 타이틀의 ‘삼각형’이란 골목의 좁은 자투리 대지를 생긴 모양대로 살려 지은 이 건물의 형태에서 따온 단어인데, 네모반듯한 빌딩의 고정관념을 깨듯 유연하게 젊은 현대미술을 담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공간 사옥을 인수해 최대한 그대로 보전한 서울의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처럼, 제주의 아라리오 미술관들도 원래 쓰이던 디테일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개성을 살렸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에서도 폐업한 지 10년 된 모텔의 특성을 보전하면서 현대미술을 위한 전시 공간으로 변형한 이 장소에 대한 재해석이 도드라진다.

4 팀의 작가들은 각자 한 층씩의 공간을 할애받아 각기 다른 미디어로 작업한 작품으로 채웠다. 정소영은 창의 유리, 나뭇바닥, 벽돌 같은 건축 소재에 주목해 물리적 공간의 물성이 사라지고 빛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제시했으며, 한쪽에서는 프랑스에서 진행한 퍼포먼스인 <숲에서 생존하는 법- 유리 트랩, 도르래, 와이어>의 기록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이주영은 공사 중에 여러 차례 현장을 방문해, 안전한 건물이 단단한 모습으로 완공되기 전에 불안정하고 매일 변화하는 모습을 기록 사진으로 남겼다. 현장의 일부를 크롭하거나 초점을 일부에 맞춘 이미지는 마치 파편적인 증거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주공간이나 사막처럼 전혀 생소한 공간 같은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를 극장에 걸기도 한 박경근 작가는 넓지 않은 공간을 인상적으로 꽉 채우는 스테인리스 스틸 구조물을 설치하고 스크린에 5채널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청계천 메들리 아시바>를 내놓고 있다. 미술과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전시 참여 작가 이름 가운데에서 잠비나이에 갸웃했을 것이다. 국악기를 사용한 독특한 대중음악을 들려주는 이들은 거문고, 해금, 기타 등의 악기에 기계장치를 결합하거나 곡물을 떨어뜨리는 등의 방식으로 음악을 변주하는 사운드아트 작업을 통해 전시에 참여했다. 그리고 뮤지션인 이들의 아이디어를 미술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사운드 아티스트 지미 세르가 손을 잡았다. ‘젊은 미술’이라고 일컫는 표현이 단지 작가의 물리적 나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동문모텔 II의 2층에서 5층 까지를 오르내리며 전시를 경험하고 나면 이해하게 된다.

김창일 회장에게, 자신의 사업 기반인 천안과 서울에 이어 제주여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 묻자 ‘자연과 접근성’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몇 해 전부터 제주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시간을 늘린 그가 청주공항을 통해 천안과 오가기 편하며, 자연 경관이 어디보다 아름답다는 것이다. “호수나 바다, 신선한 공기와 바람이 있는 곳에 미술관 짓는 걸 꿈꿔왔어요. 처음 인생의 꿈을 갖게 한 미술관은 MOCA(LA에 있는 현대미술관)였고, 그 꿈을 구체화시킨 건 DIA 비콘이었죠. 기차로 뉴욕에서 1시간 거리에, 허드슨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환경에 있어요. 지금의 아라리오 제주 4개 미술관은 시내에 있지만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내가 설계한 미술관을 짓는 게 궁극의 목표예요.” 제주 지역 사회에 경제적, 문화적으로 기여하는 한편으로 그는 아라리오 뮤지엄이 들어와서 생겨날 선의의 경쟁 또한 기대하고 있다. 정체되어 있던 제주도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도 자극이 되고, 제주 전시 공간들이 함께 질적인 향상을 이루기를 바라는것이다. 

사업가로, 컬렉터로, 갤러리 오너로 성공한 그는 위험 부담을 안고서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아티스트의 길에까지 스스로 나섰다. “사업은 단편적으로 숫자가 나오고, 단기간에 순서가 매겨지죠. 하지만 아티스트의 작업이라고 하는 것은 100년 200년 지나고 나서 재평가될 수도 있어요. 지금 나에 대한 평가가 전부는 아니라고 보고, 나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아요.” 김창일 회장에게 자신이 가진 여러 타이틀들은 쉽게 분리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삶의 지분을 쪼개 사업가로, 아티스트로, 컬렉터로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이런 여러 모습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돈이 많지 않으니까 피카소 같은 작품은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영 피카소를 찾아 현대미술 컬렉팅을 한 거고요. 아트를 모르거나 아티스트로서의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또 사업을 하면서 식당을 부수고 공사 현장을 접하기 때문에 작가로서 시멘트, 철판, 알루미늄 같은 소재를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죠. 모든 게 연결돼 있어요. 라이프 이즈 아트, 아트 이즈 라이프.”

8월 천안 아라리오에서 열릴 아티스트 CI KIM의 개인전 제목은 <익스페리먼트>다. 작가로서의 작업도, 미술관도 그에게는 스스로 믿는 가치를 세상에 옮겨놓는 실험의 과정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빨간 미술관은 왜 빨간색일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빨주노초파남보의 색감을 다 펼쳐 보이며 활용하는 것 같아요. 아트라고 하는 건 여러 사람의 등대 같은 것이되어야 하니까 빨강이 어울리지 않나요?

에디터
황선우
포토그래퍼
조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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