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를 만들어가는 현장에도 최종 결과물에 깃든 것 못지않게 진한 드라마가 있다. TV 시리즈와 뮤지컬, 그리고 대형 기획 전시의 솔직한 뒷모습을 훔쳐봤다.
“올봄을 그냥 쉬면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작품을 찾았는데 이 드라마가 눈에 띄더라고요.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드라마 <마녀의 연애> 촬영장에서 만난 엄정화가 이렇게 말했다. 이 배우에게는 2009년에 방영된 <결혼 못하는 남자> 이후 5년 만의 TV 나들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시도하는 정통 로맨틱 코미디기도 하다. “체력적으로 지치는 건 사실이지만 스피디한 현장 분위기가 오히려 집중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코믹한 장면이 많아서 분위기가 편하기도 하고요.”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화려한 경력의 탐사 보도 전문 기자인 반지연 역할을 맡았다. 단호하고 저돌적인 성격 탓에 마녀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안으로는 무른 면을 감추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단단해 보였던 무장은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윤동하를 만나면서 조금씩 허물어지게 된다. <따뜻한 말 한마디>를 통해 주목받은 박서준이 연기할 캐릭터다. 연상연하 로맨스의 시청률 경쟁에서 이미 김희애와 유아인이라는 예상 밖의 조합이 선전 중이기는 하지만 후발주자의 화력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틀에 걸쳐 방문한 현장에서 제작진은 주인공들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둘의 관계에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을 차례로 촬영하고 있었다. 일단은 일산의 CJ E&M스튜디오 내부에 지어진 점집 세트부터 살폈다. 이날 반지연은 노처녀 딸 걱정으로 속이 타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여기까지 끌려온 참이다. 그런데 점쟁이의 밉살맞은 타박을 듣고 있자니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이 치밀어오른다. “여기 영업 허가는 제대로 받고 하는 곳인가?” 결국 한마디를 내뱉지만 쉽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는 못한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떳떳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논현동의 어느 호텔바에서 진행된 신에서도 그녀의 수모는 이어졌다. 공개 프러포즈를 하는 척 굴던 남자는 돌연 태도를 바꿔 이렇게 말한다. “아, 못하겠다. 가까이서 보니까 완전히 아줌마네. 이렇게 쉽게 넘어오면 재미가 없잖아요?”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두고 보지 못하는 남자 몇몇이 함께 꾸민 지질한 장난이다. 이 순간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게 윤동하의 등장이다. 어디선가 성큼성큼 걸어 나온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반지연에게 입을 맞춘다. 너무 뻔하다 싶기도 하지만 막상 생략하면 또 섭섭할 것같은 로맨스 장르의 클리셰다.
본 방송에서는 겨우 몇 분 분량일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스태프들은 수차례 카메라 앵글을 바꿔가며 테이크를 반복했다. 여러 번 듣다 보니 배우들의 대사는 자연스레외울 지경이 됐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후반 작업 때 얹힐 엄정화의 내레이션이다. 싱크를 맞추기 위해 현장에서는 감독이 반지연의 속마음에 해당하는 내용을 대신 읽어야 했다. “이 느낌은 뭐지. 나쁘지 않은데….” 감정을 실어 키스 감상문을 읊는 굵고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좀 당황스러웠지만 연기자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시청자들이 잔뜩 몰입해서 지켜볼 키스신도 둘에게는 실수 없이 해치워야 할 미션일 뿐이었다. 엄정화와 박서준은 액션의 합을 맞추듯 고개의 각도며 손의 움직임을 계산했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도 둘 사이에는 전혀 어색한 분위기가 없었다.
“부담보다는 기대와 설렘이 컸어요.” 엄정화라는 남다른 존재감의 선배와 호흡을 맞추게 된 신인 박서준의 소감이다. “누나가 워낙 편하게 대해줘서 쉽게 친해지기도 했고요. 그보다는 첫 주연작이라는 점 때문에 긴장이 되는 것 같아요.” 엄정화는 상대역을 맡은 후배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다양한 표정을 담을 수 있는 외모라고 생각해요. 순발력도 무척 좋고요. 비교적 신인인데도 저와 함께 연기할 때 떨지를 않더라고요. 그 외에도 뭐… 목소리도 좋고 다리도 길고(웃음).”
케이블 TV 드라마의 제작 환경은 두 배우 모두에게 새롭지만 흡족한 도전이다. 다소 무거웠던 <따뜻한 말 한마디>를 마친 뒤 곧이어 <마녀의 연애>에 합류한 박서준은 밝은 장르와 과감한 표현 수위에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엄정화 역시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공중파가 아니라서 조심할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에요. 어떤 면에서는 좀 더 솔직한 이야기가 가능하겠죠.” 전파를 탈 결과물이 궁금해지는 답변이다. 4월 14일이후부터는 그 아슬아슬한 로맨스와 짜릿한 농담의 수위를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봄에 유난히 아름다운 공간들이 있는데, 대림미술관이 그렇다. 지난해 이맘때 꽃들이 미술관 앞마당을 가득 채울 즈음에는 독일의 아트북 장인 슈타이들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때 온갖 종류의 종이로 가득했던 이 4층의 공간에 올해는 드로잉, 조각, 설치와 전기 전자 장비까지 다양한 형식과 복잡한 구성의 작품이 속속 채워지고 있다. 전시의 주인공 역시, 철저하게 고집 센 독재자 장인이 아니라 유쾌하고 즐거운 세 젊은이다. 독일 출신의 에바와 코니, 프랑스 출신의 세바스찬으로 이루어진 트리오 트로이카는 영국 RCA에서 공부하며 만나 런던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그룹이다. 상하이 엑스포 영국관 대표 작가로 작업을 선보일 만큼 이들의 활동은 활발하고 작품은 강렬하며, 대중 친화적이다.
“둘이서 일하면 이분법적이 되기 쉽지만 셋이 일하면 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어요. 두 명이 흑과 백을 언급할 때 다른 한 명은 핑크를 외칠 수 있잖아요?(웃음)” 둘 대신 셋, 이분법 대신에 제3의 통합을 추구하는 건 이들의 팀 구성 형식인 동시에 작업 내용이기도 하다. 트로이카는 과학과 종교, 예술과 기술, 디지털과 아날로그 같은 상반된 가치를 나누고 구분하는 대신 둘을 합치는 방식의 작업을 시도한다. 어두운 공간 안에 조명을 쏘아 빛의 터널 혹은 교회처럼 보이는 아치를 만들고(‘Arcade’), 디지털 조형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구름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재현한다(‘Cloud’). 종이에 전기 자극을 가해 태운 궤적으로 마치 번개와 같은 무늬를 만들기도 하며(‘Light Drawings’), 스파게티 가닥처럼 바닥을 가득 채운 전선을 마치 분수처럼 솟아오르게 한다(‘Rope Fountain’). 이진법 알고리즘으로 계산된 패턴을, 주사위로 쌓아올린다(‘Dice Installation’). 이처럼 인공적인 장치를 통해 자연의 요소에 도달하려는 트로이카의 작업은 발랄하고 재치 있는 한편 엄숙하고 성스러운 구석까지 느껴진다.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까다로운 이 작품들을 설치하기 위해 전문 테크니션들이 동행했다. 모니터와 티비, 턴테이블 같은 전자제품을 둥그렇게 배치하고 거기서 생기는 전자 파동에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작품(‘Electroprobe’)을 위해서는 두 테크니션과 세바스찬이 한참 머리를 맞대며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했다.
작품의 콘셉트를 구축한 다음 실제 구현은 외부 인력에게 맡기는 일은 현대미술가들에게 흔한 작업 방식이다. 컨템퍼러리 아트는 공방의 수공예품이 아니고, ‘한 땀 한 땀’ 예술가의 손이 닿는 고전 회화나 조각 같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트로이카는 작품을 만들 때 전문 제작자에게 의뢰하는 대신 스스로 작업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한다. ‘직접 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고 이를 작품으로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짜 젊음은 물리적인 나이보다는 예술가로서 실패와 시행착오를 통해 작품의 또 다른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는 태도에 있지 않나 싶었다.
“관객이 작품에 다가가는 동안 이성적 사고에서 벗어나기를, 동시에 관념적인 생각을 통해 의미를 탐구해보기를 바라요. 여러 번 관람할수록 가능할 거예요.” 세바스찬은 마지막으로 전시장에서 북극성을 찾아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비유적 의미에서 밝게 빛나며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는 무언가를 발견하라는 뜻인지, 실제로 북극성을 숨겨두었다는 뜻인지는 밝히지 않으며,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에디터 | 황선우
“손 들어!” “잠깐, 여기선 저 사람들을 전부 제압할 수 있어야죠.” “손 들어!” 뮤지컬 <보니앤클라이드>의 개막을 보름여 앞둔 연습 현장에서, 클라이드 역할을 맡은 박형식은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손 들어’라는 세 음절을 무한히 반복하고 있었다. 클라이드가 연인 보니의 도움으로 탈옥한 후, 처음으로 함께 은행을 터는 장면이었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한마디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정작 클라이드가 되어보면, 결코 쉽지 않은 감정이에요. 그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까요. 자신은 총을 들고 있고, 은행 안의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고, 경찰이 곧 쫓아올지도,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손 들어!’라고 외쳐야 하는 거예요. 클라이드가 된 저 역시 심장이 쿵쾅쿵쾅거릴 정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천막촌에서 태어나 1930년대 미국의 경제대공황 시기에 청춘을 보내야 했던 클라이드의 내면을 자신에게 포개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박형식은 지난해 9월 초연에 이어, 다시 한번 클라이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려운 만큼 여운이 남았어요. 연습이나 공연을 마치고 차에 올라 숙소로 가는 내내 애잔하고 뭉클한 감정이 가시지를 않았거든요. ‘아, 좋다’ 그런 마음 때문에, 어려운데 정말 어려운데도 다시 하고 싶었던 거예요. 사실은 하면 할수록 조금씩 더 인정받는 데 대한 성취감도 느끼고 있고요.”
<보니앤클라이드> 초연과 얼마 전 막을 내린 <삼총사>를 거치며 이젠 뮤지컬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맨 처음 뮤지컬에 도전했을 땐 아이돌이라는 꼬리표가 여간 두렵고 조심스럽지 않았다. 자신이 뮤지컬 무대에 선다는 기사가 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을 정도다. 못하면 욕먹는 거야 당연하지만, 해보기도 전에 ‘네가 감히’라는 댓글이 달릴 때면 더욱 오기가 생겼다. 연습실에서조차 무대에 서 있는 것처럼 죽어라 연기하고 노력했다. “사실 첫 작품이었던 <늑대의 유혹> 땐, 연습을 연습처럼 했어요. 그러다 막상 무대에 올라가니 무서웠어요. 그때 깨달았죠. 연습을 실전처럼 하지 않으면, 무대에 섰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요. 무대에선 죽어도 ‘다시 할게요’라곤 할 수 없으니까요. 마치 무대에 선 것처럼 연습해야 몸이 기억할 수 있어요.”
하지만 20대 초반의 파릇한 남자 배우가 보니 역할을 맡은 가희를 소파로 쓰러뜨리고 키스하는 장면만큼은 오기와 노력 이상의 노련함이 필요했던 걸까. 연출을 맡은 왕용범 감독이 곁에 있던 또한 명의 클라이드 에녹에게 SOS를 쳤다. “에녹, 도와주세요.” 거칠게 보니를 쓰러뜨리는 장면을 해 보이는 에녹을 향해 동료 배우들의 웃음소리와 함성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브라보! 역시 30대는 다르지! 관록이 있어!” 이런 순간, 엄연히 주연 배우로 이름을 올린 박형식이 혹 자존심 상하지는 않을까 안색을 살폈다. “전 여기 연습하러 오는 게 아니라, 배우러 오는 거예요. 그게 답이에요. 클라이드를 표현하며 막힐 때마다, 선배님과 선생님들의 연기와 조언이 곧 구원인 셈이죠.”
박형식에게는 구원과도 같은 선배지만, 그 연륜은 시간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박형식과 가희를 중심으로 연습이 이루어지던 그날, 에녹은 굳이 연습실을 지키고 있었다. 박형식이 연습실 중앙에서 총을 겨누면, 그는 연습실 벽에 기대 빈 손으로 총을 겨누는 시늉을 했다. 박형식의 노래와 대사를 내내 소리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따라 연습했다. 경험은 시간이 아니라 훈련의 총합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박형식은 그 시간의 무게를 굳이 흉내 내려 하지 않았다. “실력과 연륜으로 어떻게 선배들과 겨루겠어요. 하지만 저에게선 작품 속 클라이드와 같은 20대 초반의 클라이드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의도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게, 아직 소년 태를 벗지 못한 클라이드가 저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겠죠.” 물론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보니앤클라이드>인 만큼, 박형식이 다시 연기하는 클라이드에게도 한 살이라는 시간이 쌓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솔직히 초연 때는 조금은 남자다운 척을 했어요. 그런데 이번엔 척하고 싶지 않아요. 척을 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클라이드를 표현할 수 있을까, 요즘은 내내 그걸 고민하고 있습니다.” >에디터|김슬기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황선우, 정준화, 김슬기
- 포토그래퍼
- 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