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서 음악을 빼면 패션이 된다. 음악에 음악을 더하면 축제가 된다. 여기 모인 아홉 팀의 뮤지션들이 들려주는 아홉 가지 음악에서 제각기 다른 부분을 제하면 ‘록’이라는 공통분모와 그것을 둘러싼 무한히 팽창하는 에너지가 남는다.
오지은
1집에 이어 2집 역시 셀프 타이틀 앨범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2집 준비할 당시 딱히 염두에 둔 방향 같은 게 없었다.1집이나 2집이나 오지은 이야기의 2007년, 그리고 2008년 버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기가 민망했다. 아마 3집은 다르지 않을까?
1인 제작 방식을 취했던 1집과 달리, 2집은 레이블의 힘을 빌려 완성했다. 달라진 시스템이 내용에도 영향을 미치진 않았나?
이 앨범은 소속을 갖기 전에 이미 트랙 리스트까지 완성된 상태였다. 구상했던 바를 회사가 수긍해줘서 계약이 가능했던 거다. 레이블에 속하면 음악이 바뀐다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하지만 보다 나은 제작 환경이 만들어진 만큼 전에 비해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가능했으리라 짐작된다.
물론이다. 내가 쓸 수 있는 편성이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뿐이라면 ‘진공의 밤’처럼 포기해야 하는 노래들이 생긴다.‘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같은 곡도 분위기가 굉장히 달라졌을 테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기에 개인적으로는 2집이 시원했던 음반이다. 1집만 듣고 나를 포크 뮤지션이라 단정짓는 사람들이 많아서 새 앨범을 통해 그 인식도 좀 바꾸고 싶었다.
절절하게 내지르는‘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뒤에 바로 붙는 트랙이 일본 만화 주제곡처럼 멜로디가 가벼운 ‘인생론’이다. 튈거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집어넣은 느낌이다.
그렇게 해보고 싶었고, 반응이 궁금했다. 살펴보니 평론을 하시거나 음악을 깊게 듣는 분들은 음반의 완결성을 문제 삼는 것 같다. 반면 그냥 편하게 듣는 분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눈치다. 5, 6, 7번 트랙을 빼버렸다면 문제는 간편했을 거다. 하지만 좀 다른 선택을 해보고 싶었다.‘ 인생론’은 노래를 쓰는 여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완성한 곡이다. 어찌 보면 이게 결론인 셈이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춤추던, 영화 <자토이치>의 엔딩 신과 비슷하달까? 내가 겪어온 감정을 편집하지 않고 내보이는 게 좀 더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리스너들과 ‘교감’이 이루어진다는 걸 언제, 어떻게 느끼나?
얼마 전 공연하며 관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전 여러분 들으라고 음악 하는 게 아니라고. 사실이다. 내가 원하는 음악을 하는데 함께 좋아해주는 상대가 있는 거다. 그 상황의 마법스러움이랄까?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내 노래에 대한 긍정의 피드백을 받을 때 아, 똑바로 하고 있구나 싶어진다. 뭔가 허락받은 기분이 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했던 록음악을 기억하나?
블랙 사바스의 ‘Changes’. 카펜터스, 비틀스, 로버타 플랙까지 다 섞여 있던 불법 컴필레이션 앨범에서 이 곡을 발견했다.아마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거다. 당시엔 김완선이나 앤 머레이를 좋아하면서 블랙 사바스도 즐겨 듣는 식이었다. 난 음악을 한번도 마니아적이라든가 장르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취향과 습관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에 특별히 영향을 미친 록음악이 있나?
없다. 그런데 커트 코베인 사망 당시 난 저렇게 죽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 내가 고통스럽게 만든 음악이 남들에겐 값싼 정신적 유희로 소비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의 음악에 헤드 뱅잉하는 사람들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한국은 로커가 살기에 어떤 나라일까?
죽이는 곳이다. 분노할 일 천지니까.
에디터 l 정준화
YB
최근 발표한8집의 타이틀이 <공존>이다. 앨범을 들어보면 일단서로 다른 스타일의 공존이란 느낌부터 든다. 다양한 장르와 사운드를 의도적으로 포섭하려 했던 건가?
윤도현 의도는 아니다. 오히려 처음엔 하나의 색으로 절제하려 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작업이 너무 답답해지더라. 해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하게 됐다. 대신 전체적인 통일감을 주고자 편곡이며 사운드 메이킹에 신경을 썼다.
묵직한 가사들이 많다. 그 때문인지 ‘공존’이란 단어도 희망적으로만 들리진 않는다. 암담한 세상의 문제마저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체념 같은 게 행간에서 읽힌다.
박태희 그냥 우리가 마주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노래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희망이 없었다면 아예 음반을 안 만들었을 거다.
YB에겐 국민밴드라는 별명이 여전히 따라붙는다. 부담스럽지는 않나?
김진원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덕분에 어느 록밴드보다도 다양한 관객층과 만날 수 있으니까. 어린아이부터 나이가 있으신 분까지 우리 음악에 고루 호응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부담이라면 히트곡에 대한 것 정도?
이번 음반에 수록된 ‘Talk To Me’는 인터넷 악플에 대한 노래다. 겪고 느낀바가 있어서 만든 곡이 아닐까 생각된다.지금껏 접해본 악플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어떤 내용이었나?
윤도현 악플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너무 많아서 다 외우기도 힘들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 역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반면 애정 어린 충고라면깊게 새긴다. 그 둘을 잘 구분하는 판단력이 이젠 그나마 생긴 것 같다.
2005년부터 꾸준히 해외 투어나 록 페스티벌 참여를 감행하고 있다. 그 경험에서 어떤 에너지를 얻고 돌아오나?
허준 세상에 음악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확인하고,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음악을 하는지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경험이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텍사스 오스틴에서의 페스티벌이 기억에 남는다. 3일 동안 2백여 군데 클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연이 이루어지는 행사다. 그 많은 뮤지션들이 나름의 음악을 하고 있으며, 그 다양성이 다 인정받는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미국에서 딱히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험에서 받는 에너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볼 만했으며, 계속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거꾸로 한국에서 느끼는 바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곳은 로커가 살기에 어떤 나라라고 보나?
허준 음악 하는 사람이 잘 살지는 못하는 나라다. 주류가 너무 강해서 비주류의 취향이 버티기가 어렵다.
김진원 슈퍼마켓에서도 레드 제플린 음악이 대수롭지 않게 흘러 나온다는 점에선 영국 같은 나라가 부럽다. 클래식이 지켜진다는 증거니까. 한국의 라디오는 들국화나 신중현의 음악을 트는 일에 인색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했던 록음악은 각각 어떤 곡들이었나?
윤도현 도어스‘. Light My Fire’나‘People Are Strange’ 같은 곡들.
박태희 10대 때 록이라는 개념도 없이 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좋아했다. 그 다음엔U2.
김진원 처음 샀던 테이프가 레드 제플린의 였다. 첫 트랙‘Achilles Last Stand’를 들은 순간이 지금까지 강렬하게 남아 있다.
허준 고교 시절 들었던 에릭 클랩튼의 라이브 앨범 . 오지 오스본, 핼로윈, 메가데스, 메탈리카 등등도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볼 때 가장 기억이 또렷한 건 그 음반이다. 다양한 장르를 블루스로 근사하게 아우른다.
참 넓게 쓰이는 단어, 록을 정의하는 요소는 뭘까?
윤도현 솔직한 것. 그리고 용감한 것.
에디터 l 정준화
이지형
이지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그동안 너무 운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실력과 끼에 비해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는 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그냥 흘려 듣는 편이다. 어쩌면 나에게 운이 찾아왔는데 도움켜쥐지 못한 걸 수도 있고.
앨범 수록곡 중 ‘메탈 포크 주니어의 여름’이라는 노래가 있다. 스스로를 ‘메탈포크 주니어’라고 칭하는 건 어떤 이유에선가?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린 시절, 록스타에 대한 동경과 환상이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듣던 음악은 메탈과 포크라는 극과 극의 장르였다. 강렬한 데스 메탈과 잔잔한 포크 음악을 같이 들었으니까. 어린 시절 내 음악적 자양분을 찾는 키워드들을 합친 것이 ‘메탈 포크 주니어’다.
그러고보니 당신도 이제 ‘품절남’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나니 세상이 달라보이던가? 결혼이 음악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새 앨범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실감은 안 난다. 물론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었으니까 음악도 변하겠지. 그게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 아, 결혼하고 나서 살이 좀 찌긴 했다(웃음).
토이의 객원 보컬로 활동한 건 당신의 음악 생활에 어떤 의미인가?
그동안 좋아하고 만나고 싶었던, 음악적으로 성공한 뮤지션이 함께하자고 제안했을 때, 당연히 기뻤다. 상업적인 인지도를 쌓을 수 있겠다는 여타의 계산도 물론 있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선배의 제안이라는 점이 가장 좋았다.또, 데모로 건네받은 노래도 정말 좋았고. 예전의 활동 반경을 보면 홍대를 중심으로 한 팬 층이 전부였는데, 토이객원 보컬로 활동하면서 비교도 안 되게 알려졌다. 또, 그것 이상으로 음악적인 성숙도 꾀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다. 이거 희열이 형이 보면 또 우쭐하겠지만(웃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록 음악은?
AFKN에서 들은 너바나의‘Smells Like Teen Spirit’,그리고 R.E.M의 ‘Losing My Religion’.
요즘 한국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한 시기다. 모두를 위로해줄 수 있는 음악 한 곡을 추천한다면?
데니슨 위트머의 ‘Are You A Dreamer?’나 역시 이 노래로 많은 위안을 받았다.
마음대로 공연을 하나 올릴 수 있다면, 어떤 무대를 꾸며보고 싶은가?
어쿠스틱 기타를 가지고, 녹음 짙은 공원에서 포크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페스티벌을 종일 열어보고 싶다.
새 앨범에 대한 힌트를 하나 정도 귀띔해준다면?
지금까지 나는 추억과 그리움만으로 음악을 만들었던 것 같다. 새 앨범은 현재의 이야기가 주제가 될 거다. 지금 이 순간의 이지형이 요즘 최대 관심사다.
에디터 l 서동현
뷰렛
2003년부터 지금의 멤버로 활동해왔다. 밴드 초창기와 지금을 비교할 때, 음악 하는 환경은 어떻게 달라졌나?
이교원 클럽의 환경이나 악기들, 시설, 시스템이 상당히 좋아졌고 록 페스티벌도 많아졌다. 지금의 음악 환경을 탓한다면 10년, 20년 지나서도 여전히 만족할 수 없을 거다.
안재현 리스너들의 수준 또한 높아졌다. 2003년 당시에는 EP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없었는데 지금은 싱글이니 미니니 하는 여러 형태의 앨범을 내는 시대다. 게다가 온라인이나 홈 레코딩을 통해 기획사 없이도 음악을 할 수 있는 통로가 많이 생겼다. 여전히 공중파에서 인디밴드의 음악을 알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주류 음악만 대중들이 접하는 것도 현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보컬 문혜원은 뮤지컬 무대에도 자주 오른다.
문혜원 밴드의 재미는 직접 만든 곡을 가지고 무대에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지만 목소리를 디테일하게 내기엔 어려운 점이 있다. 보컬리스트로서 숨소리 하나까지원하는 표현을 살릴 수 있는 건 뮤지컬 쪽이다.
멤버들을 묶어주는 공통의 음악 취향이 있나?
문혜원 각자 다르다. 음악적으로 모였다기보다는 마치 삼남매처럼 서로가 잘 맞아서 모인 것 같다. 교원이 같은 경우에는 펑크를, 재현이는 잔잔한 재즈 음악을, 나는 여성싱어송라이터들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 세 멤버가 만나면서로 좋아하는 장르들이 뒤섞인다.
참 넓게 쓰이는 단어, 록을 정의하는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안재현 장르를 떠나서 무언가를 말하고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힘, 에너지가 록이다.
이교원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배출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일방적인 음악을 하고 싶다.
문혜원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는 우리나라에서, 좋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록은 자유다.
청중과 교감하는 순간을 언제 느끼나?
문혜원 기타리스트 김광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대에서 뿅 가면 여자든 돈이든 다 필요 없게 된다.”고도의 집중이 이루어질 때, 술이나 마약을 안 하고도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아지경의 기분을 무대 위에서 느끼기도 한다.
처음으로 듣고 좋아했던 록 음악이 무엇인가?
문혜원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고등학교 시절 들은 노래들이 평생 간다. 펄 잼, 레드 핫 칠리 페퍼스 같은 90년대 얼터너티브 밴드들을 좋아했다.
안재현 홀과 너바나를 좋아했다. 82년생인데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밴드 음악보다는 댄스 음악이 인기가 더 많았다. 음악 취향 때문에 아웃사이더였다(웃음).
이교원 아는 형이 메탈리카 CD를 줘서 처음 듣고 깜짝 놀랐다. 수록곡들이 너무 길어서. 한 곡에 8분짜리! 계속 ‘징징징징’대서 처음엔 내가 잘못 플레이한 줄 알았다.
음악으로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나?
문혜원 사람이 태어나는 목적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노래를 만드는 게 우리의 재능이라면, 그 재능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살아가게끔 영향을 줘야 할 거다. 나 또한 사춘기 때 외국 뮤지션들의 노래를 듣고 가사 한 줄에 의지하며 견뎠다.
한국에서 록음악을 한다는 것은?
문혜원 북한에서 록 음악을 안 하는 게 어딘가(웃음).
안재현 록이라고 단정 짓지 않고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감사할 일이라고 여긴다.
에디터 | 황선우
갤럭시 익스프레스
올여름도 각종 록 페스티벌의 게스트로 바쁘게 보낼 것 같다.
박종현 루비쌀롱 레이블 쇼가 끝나면 썸머 슬램이 기다리고 있고, 또 프랑스 뮤직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았다. 1년에 한 번 모든 국민들이 악기를 들고거리로 나오는, 파리 시내에서 벌어지는 축제다.
사실 갤럭시 익스프레스 공연에 열광하지 않기란 힘들다.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해본 적 있나?
이주현 많이 있다. 초등학생들과 선생님을 앞에 두고 공연한 적도 있다. 그냥 재밌다.
무대 위에서는 거의 차력과 애크로바틱을 하면서, 지금은 굉장히 점잖고 얌전해 보인다.
박종현 그런 소릴 많이 듣는다. 근데 뭐 일반적으로 말할 때 막 소리지르면서 말하진 않으니까. 그냥 보통의 대화인 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했던 록음악이 있다면?
박종현 처음 기타를 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건 너바나다.
이주현 어느 날, 배철수의 음악 캠프에서 너바나의 보컬이 죽었다고 했을때, 처음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누군지도 몰랐는데 듣다 보니 너무 좋아서 바로 테이프를 샀다. 그런데 분명 그 공간에 40명이 함께 라디오를 들었는데, 나만 이렇게 된 거 같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을지.
김희권 친구가 메탈리카가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영상을 보여줬다. 그거 듣고 감동을 먹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음악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음악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나?
박종현 나 같은 경우는 음악을 강렬히 해야겠다는 그런 생각보다도, 학교나 직장 생활에 자질이 없고 하기 싫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레 관심 있는 것에 손을 대게 된 거다.
이주현 난 학교 다니다가 음악이 하고 싶어서 다 때려친 경우다. 미래는 보지 않고 바로 눈앞에 펼쳐진 음악을 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지금도 하루살이처럼 일주일에 한 번 공연하는 재미로 산다. 넓게 보지는 못한다.
김희권 고2 때 처음 스틱을 잡았는데, 그때만 해도 꼭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드럼이 너무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지금까지 치고 있는 거다.
한국 록 페스티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주현 힙합 페스티벌은 없는데 TV를 틀면 노래가 많이 나온다. 이제 힙합은 주류 음악이고 팝이 되었다. 미국의 록 페스티벌은 많지만 미디어에 비친 록음악이 없으니까 오는 사람들만 오는 끼리끼리 문화가 되어 점점 좁아지는 거 같다. 강원도 삼척에서도 록 페스티벌이 벌어지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들 앞에서 공연하는 게 아니라 시민들 앞에서 공연하는 문화가 됐으면 한다.
요즘 각자 꽂혀 있는 생각은? 예를 들면 세계 평화나, 지구 멸망 같은 것들.
이주현 사랑과 평화. 인간의 가장 순수한 에너지가 사랑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질투와 불안감이 있다. 밝음과 어두움, 이 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앨범을 하나 완성해도 완성했다는 기쁨과 동시에 잘 안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이 고리를 끊을 수 없는 걸까, 라는 고민을 집에서 쭉 하고 있다.
박종현 내가 어떤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있다. 나의 진짜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어떤 걸 흉내 내기보다는 진짜 나를 보여주고 싶다. 그것이 실생활에서건, 음악에서건 간에. 김희권 난 건강. 수술을 한 달 새에 두 번이나 했다. 비염과 코골이 수술.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록음악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박종현 내 가슴속 깊숙이 자리 잡은 무거운 돌덩이.
에디터 l 서동현
크래쉬 안흥찬
여러 해외 뮤지션들의 내한 공연에 무대 감독 자격으로 참여한바 있다. 그 투자 규모를 국내 실정과 견주어 볼 때, 뮤지션으로선 어떤 생각이드나?
여기는 정말 좁은 나라고 난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싶을 때가 있다.엘턴 존의 경우, 5톤짜리 컨테이너 13개 분량의 장비를 준비해 한국을 찾았다. 관중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한 배려인 셈이다. 반면 한국에선 공연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기술 인력조차도 부족한 형편이다. 전문 스태프가 넉넉지 않으니 공연 때마다 프로모션부터 무대 설치 단계까지 줄곧 문제가 발생한다. 언제쯤 발전할까 답답할 때가 많다.
KM/Mnet에서 방송 중인 <타임 투 록>의 진행자로서 매주 홍대앞의 신인 밴드들을 인터뷰한다. 선배 뮤지션 입장에서 나름의 감상이 있을 것 같다.
‘왜 음악을 하지? 개념은 집에다 두고 왔나?’싶은 친구들도 종종 만난다.하지만 가능성이 상당한 밴드들을 그 이상으로 많이 발견하고 있다. 이제 홍대 인디신은 아마추어 일색이던 십수 년 전과 달라서 그 스펙트럼이 퍽 넓다. 그래서 새로운 팀들을 만나는 게 무척 재미있다. 가끔 인터뷰 끝난 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란 말을 전화번호와 함께 건네기도 한다.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내 살 길만 찾기보단 후배들도 함께 끌어올려주고 싶다.<타임 투 록>이 좋은 계기가 됐다.
크래쉬는 현재 새 앨범을 준비 중이다. 5집 를 발표한 게 지난 2003년이니 6년 만의 복귀인 셈이다. 그 기간 동안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텐데 결국 데뷔 시절의 사운드로 돌아가겠노라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 우리 같은 음악으로 부귀 영화를 누릴 시대도 아니니 초심으로 돌아가 하고 싶은 음악을 원 없이 해보자 생각했다. 1집의 멤버들이 다시 모이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다. 우리는 어찌 보면 이기적이어서 남들보다는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음악이 좋다. 나부터 자신하는 앨범이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떳떳하게 들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밴드의 색을 지키는 동시에 정체되지 않기 위한 고민이 클 거라 짐작된다.
그래서 새로운 음악들도 놓치지 않고 접하려 한다. 소신을 지키되 트렌드를 알고 표현하는 것과 모르고 표현하는 건 확실히 다르다고 본다. 도는 닦되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고 닦자는 게 내 생각이다.
크래쉬처럼 오랫동안 견고하게 유지되는 밴드가 이 땅에서는 손가락 안에 꼽힌다. 한국은 로커가 살기에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나?
좋지 않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살아선 안 되는 곳? 한국에서 문화는 늘 실용적 가치에 밀려나기 일쑤다. 누군가 그러더라. 제아무리 지미 헨드릭스라도 여기서 태어났으면 빛을 못 봤을 거라고. 로커가 살기에 한국은 전쟁터다.
시간을 좀 거슬러 가보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했던 록음악은 무엇인가?
딥 퍼플, 그리고 주다스 프리스트. 1986년에 내 돈 주고 처음으로 산 게 주다스 프리스트의 앨범이었다. 사실 주다스 프리스트 내한 공연 때도 내가 무대 감독을 맡았는데 그 기분은 정말 아무도 모를 거다.
록이란 무엇인지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방종의 선을 넘지 않는 자유의 최대치, 그게 록이다.
에디터 l 정준화
국카스텐
어딜 가나‘국카스텐의 공연은 끝내준다’는 얘길 듣는다. 언론에서 입을 모아 칭찬하는 밴드이며 앨범도 꽤 많이 팔렸다. 이 정도의 반응을 예상했나?
하현우 우리 앨범은 라이브 때문에 팔린 거다. (진지하게)우리는 라이브를 아주 잘한다. 공연장에 와보면 우리 음악이 진짜 어떻다라는 걸 알 수 있다.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녹음한 게 아니라서 앨범으로 들으면 좀 가벼울 수도있는데, 100명 중 99명은 앨범보다 라이브가 낫다고 평가한다.
전규호 라이브 공연에 와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
밴드 히스토리 보니까, 뭔가 가슴 찡하고 눈물이 막 날 것같은 절절한 사연이 있다. 음악을 포기한다 해도 뭐라고할 수조차 없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 놓지 않은건 무엇 때문이었나?
하현우 그냥 미쳐서 그런 거다. 도박에 미친 사람에게 제발 그만두라고 해도, 가족까지 다 팔아가면서까지 하지 않나. 우린 가족은 안 팔아도, 돈은 못 벌어도, 여기에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사실 도박하는 사람과 그다지 다를바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우린 삶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이라는 것 정도.
이정길 사람들은 각자 취미 생활이 있다. 누군가는 축구를 좋아하다가 그게 업이 되는 것처럼. 어렸을 때는 그저 즐거워서였는데 이제는 뭔가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니까 놓을 수가 없게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고 정말 짜릿하다고 생각했던 음악이 있었나?
하현우 한대수 씨의 ‘물 좀 주소’를 듣고 진짜 물이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콘의 ‘Blind’를 우드스탁 라이브 실황으로 목격했을 때.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넋이 나갔다.
이정길 라디오에서 메탈리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그리고RATM! 하지만 감동을 주는 건 역시 라디오 헤드다.
밴드 이름을 짓는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일 거 같다. 밴드 이름은 그 밴드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니까. 중국 만화경을 뜻하는 국카스텐이라 이름을 짓기 전, 또 다른 후보가 있었나?
하현우 ‘큐비즘’이란 이름을 후보로 올려놨었다. 입체파 그림을 큐비즘이라고 하는데, 사물을 낯선 형태, 이질적인 느낌으로 표현하는 걸 뜻한다. 음악이라는 악기를 통해서 전혀 낯선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게 큐비즘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걸로 할까 했다.
한국은 록 뮤지션으로 살아가기에 괜찮은 나라라고 생각하나?
하현우 전혀 아니다. 우선 앨범이 안 팔린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또 진지하게) 아니, 국카스텐처럼 뛰어나도 앨범이 잘 안 팔린다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다. 한국에서 음악을 하려면 아예 그런 욕심을 버려야 한다. 헛된 기대를 하게 되면 정말 실망이 너무 클 거다. 앨범 많이 팔리고 물질적인 풍요까지 밴드 하면서 얻고자 한다면 다른 일 해서 돈 버는 게 낫지.
전규호 근데 다른 일 해서 돈 벌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그냥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여름이다. 록 페스티벌들이 속속 열릴 터인데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하현우 패가 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작은 땅덩어리에서, 음악 페스티벌의 명맥을 유지하기 힘든 거 뻔히 알면서 자기 이득 더 챙기겠다고 갈라서는 건 정말 아니라고 본다.
벌써 2009년의 절반이 지났다. 나머지 절반의 계획은?
하현우 일단 건강하게, 12월까지 살아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아무 일만 없으면 국카스텐은 쭉 잘될 거다.근데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그게 문제다. 사실 난 이런 평화롭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불안하다.
김기범 저 형은 꼭 저런다.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이거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그런다. 알았으면 좀 막아보지.(다들 웃음)
마지막 질문. 국카스텐을 하면서 생긴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이를테면 주변에 예쁜 여자가 많아졌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김기범 나는 국카스텐 하면서 여자친구랑 헤어졌다.
하현우 우린 그런 거 아예 없다.
전규호 그냥 먹고 싶은 거 먹을 수 있다는 거?
하현우 그냥 멤버들마다 담배가 한 갑씩 주어질 수 있다는 게 가장 긍정적이다. 그리고 배고플 때 아무거나 먹을수 있다는 것도. 우리 아까도 닭볶음탕 먹었다. 예전엔 공연 끝나면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때웠는데, 이런 거야말로 진정 행복이다.
에디터 l 서동현
W&WHALE
드디어, 더블유와 더블유의 만남이다.
한재원 우리가 그룹 이름을 바꿨을 즈음 잡지가 창간했다. ‘인터뷰를 왜 빨리 안 해주나?’내심 기다렸다(웃음).
일렉트로닉 팝을 기본으로 한 더블유 앤 웨일의 음악 스타일을 ‘록’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같다.
배영준 증폭된 기타 사운드와 요란한 드럼 비트만이 록이 아니다. 음악적인 형식보다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메시지, 진보를 지향하는 자세가 록의 핵심이다.웨일 존 메이어를 좋아하는데, 그의 유튜브 영상에 이런댓글이 달려 있었다.“ Keep on rocking the world!”그렇게 세상을 흔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음악이 록 아닐까.
보컬을 제외한 더블유의 음악은 조금 더 얇고 건조한 음색이 어울릴 톤이다. 웨일의 영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배영준 바로 그 점 때문에 반전을 노렸다. 블루스가 어울리는 웨일의 음색에는 그 나이에 가지기 힘든 한스러움도 있다. 가사 이상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는 목소리다.
김상훈 우리 멤버들이 자리를 비켜주고, 혼자 기타를 치며 감정을 잡고 노래를 할 때야말로 웨일 본연의 색깔이 강하게 드러나는 시간이다.
‘RPG 샤인’이 CM송으로 쓰이면서 밴드의 이름을 알렸는데 뮤지션 입장에서는 어땠나?
한재원 자존심 상하기도 했지만, 음악이 단순히 소모품처럼 쓰여지지는 않은 영상이었다. 물론 크게 히트해서 기분이 좋아진 면도 있다(웃음).
배영준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뛰어넘느냐가 우리의 숙제다. 새 싱글을 발매할 때마다 CF와 타협할 순 없으니까.
음악적 히스토리가 서로 다른 멤버들의 방향성을 묶어주는 접점의 음악은 무엇인가?
한재원 앨범 작업을 많이 하다 보면 ‘다음엔 이런 색깔로해볼까?’하는 레퍼런스가 생기게 마련인데,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시도해보는 노래, 가사, 연주들에서 섞여 나오는 것이 우리의 음악이다.
배영준 그렇게 자연스러운 믹스가 가능하려면 평소에 음악을 많이 듣고 책이나 영화를 많이 봐야 한다. 실제로 우리 멤버들 각자가 문화에 대한 갈증이 엄청나게 큰 편이다. 웨일만 하더라도, 나조차 생전 처음 보는 밴드의 음악을 찾아 듣는다. 서로 다른 음악적인 감수성이 자극이 되고, 같이 공부하게 만든다.
사람들을 음악으로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는가.
배영준 이제는‘세상을 바꾸는 힘이 음악에 있다’고 믿을만큼 순진하지 않다. 60~70년대에는 그런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다만, 역사에 대한 무지는 죄라고 생각한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깨어 있어야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음악도 나올 수 있다.
공연에서는 레코딩과는 다른 음악적 시도가 가능하다. 더블유 앤 웨일의 드림 콘서트는 어떤 그림이 될까?
배영준 벡이나 비요크, 다프트 펑크 같은 뮤지션들은 음악도 훌륭하지만, 퍼포먼스가 볼 만하다. 무대 위 연주와 노래 실력은, 무대 뒤의 조명이나 음향 등 시스템과 맞아떨어질 때 가장 잘 발휘된다. 더블유가 지향하는 라이브는 ‘버라이어티쇼’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이내믹한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
무대에서 느끼는 희열, 관객과의 교감은 어떤 순간에 오나.
배영준 우리는 아직도 스스로를 스튜디오 뮤지션이라고 생각한다. 라이브에서 직접 소통하는 것은 어찌 보면 뮤지션의 궁극이라 할 수 있지만, 잘 만들어진 음원을 가지고 리스너들과 교감하는 것이 좀 더 마음 편한 일이다.
웨일 무대에 오르면 ‘틀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앞서서 긴장한다. 경험과 연륜이 더 필요하다(웃음).
에디터 | 황선우
검정치마
검정 치마의 음악을 듣고 모두 ‘한국에도 이런 음악을 하는 밴드가 있다니!’라고 말한다. 검정 치마의 음악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조휴일 대중성 있는 인디 팝. 검정 치마의 1집은 인디와 가요 사이의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홍대 앞은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공간이다. 홍대앞에서 몰아내고싶은 것 세 가지 정도를 꼽는다면?
조휴일 여자들에게 껄떡대는 외국인, 그렇게 복잡한데 굳이 끌고 나오는 자동차, 그리고 외국인을 노리는 여자들.
검정 치마의 공연을 찾는 관객들은 대부분 여자들이다. 그 이유는?
류영 없어서 하는 말인데, 드러머인 정경용이 잘생겨서 그렇다.(웃음)
공연을 하다 보면 관객과 교감한다는 느낌을 받게 될 텐데, 그건 말로 설명하기 힘든 느낌일까?
조휴일 검정 치마의 라이브가 크게 호소력 있는 공연은 아니다. 그저 노래를 충실하게 재현하려고 노력하는데, 관객들이 큰 소리로 함께 노래를 불러준다. 그게 우리 공연의 특징이다. 일명 가라오케 식의 진행이라고. 근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무척 싫어한다. 음악 들으러 왔는데 옆 사람들이 크게 따라 부르니까. 그런데 우리 입장에선 즐거운 일이다.
요즘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다. 음악이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본다면 추천하고 싶은 음악은?
류영 지금 의견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는 게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음악이 제일 좋은 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들린다는 거다. 젊은 사람, 늙은 사람,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귀에도 너바나의 노래는 똑같이 좋게 들릴 거 같다.
조금은 무의미한 질문일 수도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음악을 할 생각인가?
조휴일 할 줄 아는 게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앞으로도 음악을 계속 할 거 같다.
류영 어떤 식으로든 음악과는 함께하겠지만, 일단 직업이 되는 순간 재미와 애정이 식을 거 같아 고민 중이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하고, 제일 좋아하는 건 취미로 하라는 말도 있지 않나. 그 말이 좀 맞는 거 같기도해서.
조휴일 사실 나도 이번에 그런 말을 실감했다. 일이 되어버려서 똑같은 노래를 계속 부르고 다니니까, 창작 활동이 안 된다. 음악을 세컨드 잡으로 하고 수영장을 청소하던 예전에 노래도 잘되고 음악도 잘됐다. 그때 진짜 열심히 했는데.
록음악은 어떤 거다. 정의를 내린다면?
조휴일 ‘록을 정의하는 것은 록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류영 지루하고 의미론적인 얘길 하자면 음악은 1차적인 예술 같다. 미술이나 글은 내 머릿속을 한 번 거쳐간 다음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음악은 그냥 귀로 들으면 되지 않나. 아마도 음악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끝까지 남아 있을것 같다.
조휴일 정말 그렇다. 구전 가요라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고 해도, 음악은 살아 남을 거다
에디터 l 서동현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정준화, 서동현, 황선우
- 포토그래퍼
- 김보성
- 아트 디자이너
- 박나리